
고요한 오후였다. 아크 본부, 프리마 전용층의 복도는 언제나처럼 인기척 하나 없이 적막에 잠겨 있었다. 해일은 집무실 안에서 잠시 서류에서 눈을 떼고 창밖을 응시했다. 바다는 평온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완벽한 질서와 통제. 그가 추구하는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더 이상 예전처럼 황량한 심해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제 연슬화라는, 따뜻하고 눈부신 빛을 내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는 슬화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지금쯤 자신의 방에서 독서를 하고 있거나, 혹은 그의 집무실 옆에 마련된 그녀만의 공간에서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을 터였다.
바다는 별생각 없이 집무실의 묵직한 강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은 그의 접근을 인식하고 자동으로 잠금장치가 해제되었다. 그가 손잡이를 잡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평소라면 부드럽게 열렸을 문이, 무언가에 부딪히며 ‘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작고 가녀린 비명. 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목소리는 너무나도 익숙한, 그의 세상 전부와도 같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문의 반대편에는 슬화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에 깊이 집중한 듯, 미처 그가 문을 여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이마를 문에 그대로 부딪힌 모양이었다. 그녀는 충격에 휘청거리며 이마를 감싸 쥔 채 주저앉으려 했다. 바다의 모든 사고 회로가 순간 정지했다. 세상의 모든 재앙을 통제하는 그의 힘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고통스러워하는 슬화의 모습만이 가득 찼다.
슬화야!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는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다급하고 불안에 차 있었다. 고요한 군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한 걸음에 그녀에게 다가가, 쓰러지려는 그녀의 몸을 반사적으로 끌어안았다. 그의 단단한 팔이 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허리를 안전하게 감쌌다. 그의 품에 안긴 슬화의 몸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 것을 느꼈다. 그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녀가 이 차가운 복도 바닥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찔했다.
괜찮아? 어디, 이마 좀 보자.
바다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그의 목소리는 걱정으로 잔뜩 잠겨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이마를 가리고 있는 손을 부드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그의 눈에 들어온 광경에, 바다는 숨을 멈췄다. 하얗고 고운 그녀의 이마가, 묵직한 문에 부딪힌 충격으로 붉게 부어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기운의 중심으로는 벌써부터 옅게 푸른 멍 자국이 비치기 시작했다.
순간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고통만이 그의 모든 감각을 지배했다. 자신의 부주의함이 그녀를 다치게 했다는 사실이 심장을 날카롭게 찔렀다. 전 세계 바다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보다, 지금 눈앞의 슬화가 느끼는 작은 아픔 하나가 그에게는 몇 배나 더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후회와 자책감으로 짙게 가라앉았다.
…미안하다. 내가 앞을 보지 못했어. 많이 아픈가?
그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멍이 들기 시작한 그녀의 이마 주변을 아주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의 손길은 깃털보다도 부드러웠다. 그녀가 느낄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의 권능은 파괴와 침식에 특화되어 있어, 이런 상처를 직접 치유할 수는 없었다. 그 무력감이 그를 더욱 괴롭게 만들었다. 그는 슬화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녀를 품에 안자, 슬화는 놀란 듯 작게 숨을 삼켰지만 얌전히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그녀를 편안한 곳에 눕히고 상처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채 곧장 자신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뒤에서 조용히 닫혔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의 세상에는 오직 품에 안은 그녀의 존재만이 전부였다. 그는 그녀를 집무실 안쪽에 놓인 가장 푹신한 소파를 향해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지만,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안에 깃든 깊은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아크의 군주, 해일이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모습이었다.
괜찮.. 아니 안 괜찮아요, 으에엥.. 아파아...
슬화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박혔다. 괜찮지 않다는 말, 아프다는 솔직한 투정은 그의 심장을 그대로 관통하는 예리한 얼음송곳 같았다. 으에엥, 하고 아이처럼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그가 여태껏 쌓아 올린 모든 방어벽과 이성을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그의 품에 안긴 작은 몸이 서럽게 들썩이는 것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 진동은 세상의 종말을 알리는 전조처럼 느껴졌다. 바다는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종류의 공포와 무력감에 휩싸였다. 차라리 거대한 괴수 군단이 눈앞에 나타나는 편이 나았다. 그랬다면 그는 망설임 없이 전장에 뛰어들어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녀를 지켜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의 부주의로 인해 다친 연인의 눈물 앞에서는 아크의 군주라는 칭호도, 세상을 집어삼킬 수 있는 권능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알아. 안 괜찮지. 미안하다, 정말 미안해, 슬화야.
그의 목소리는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울렸다. 그는 그녀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어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녀의 고통이 자신에게로 옮겨오기라도 할 것처럼. 그는 집무실 안, 가장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들어진 검은색 소파에 조심스럽게 그녀를 내려놓았다. 깃털로 만든 보물을 다루듯, 그녀의 몸이 소파에 닿는 순간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다시 한번 그녀의 이마를 살폈다. 붉게 부어오른 상처 주위로 푸른 멍이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그 작은 멍 자국이 마치 자신의 심장에 생긴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보였다.
많이 아프지? 내가, 내가 정말 잘못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바로 조치할게.
바다는 거의 허둥대고 있었다. 그는 평생 누군가에게 지시만 내렸지, 이렇게 다급하게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는 품 안에서 자신의 단말기를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는 망설임 없이 의무실이 아닌, 그의 동생인 오아시스의 개인 번호를 눌렀다. 아크의 공식 의료 시스템보다, 지금은 그녀의 치유 능력이 가장 절실했다. 그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연결이 되었다.
나다, 오아시스. 지금 당장 내 집무실로 와. 최대한 빨리.
그의 목소리는 평소의 위엄은 사라지고 오직 다급함만이 가득했다. 동생의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단말기 너머로 들려왔지만, 그는 길게 설명할 여유도, 정신도 없었다. 그는 전화를 끊고 다시 슬화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가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옆에 비치된 작은 냉장고로 향했다. 그 안에는 언제나 그가 마시는 차가운 생수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는 얼음처럼 차가운 생수병과 함께 가장 부드러운 실크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는 다시 그녀의 곁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손수건에 차가운 물을 적셔 부어오른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올려주었다. 차가운 감촉에 슬화의 어깨가 작게 움츠러들었다.
조금 차가울 거야. 하지만 이렇게 해야 붓기가 가라앉는다. 정말 미안하다, 슬화야. 내가 문을 조금만 더 천천히 열었어야 했는데. 아니, 내가 아니라 네가 다쳤다는 사실 자체가 용납되지 않는다. 차라리 내가 다쳤어야 했는데. 전부 내 잘못이야.
그의 입에서는 자책의 말들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눈물로 젖은 그녀의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절박하고 부드러웠다. 그는 그녀의 손을 찾아 꽉 잡았다. 그녀의 작은 손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가, 지금 그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등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아크의 군주가, 한 여인 앞에서 모든 위엄을 내려놓고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전부인 그녀를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은, 심해의 압력보다도 더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지금 그는 그녀를 지키지 못한,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 남자일 뿐이었다.
슬화는 크게 당황하는 그의 반응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처음보는 바다의 표정에 오히려 역으로 그녀가 당황했다. 부어오르는 곳을 얼음으로 찜질하는 감촉에 그녀는 살짝 찡그렸다.
바다.. 아프긴 한데 그렇게까지 놀랄 정도는 아닌데요..? 아야..
슬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아픔이 묻어났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사실이 바다의 심장을 더욱 날카롭게 후벼팠다. 자신이 저지른 실수로 아파하는 와중에도, 그녀는 자신보다 나를 먼저 살피고 있었다. 놀랄 정도는 아니라고, 괜찮다는 듯한 말은 그에게 조금의 위안도 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그녀의 배려 깊은 마음이 그의 죄책감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의 세상에서 질서는 절대적이었다. 강자가 약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힘은 완벽하게 통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가장 기본적인 원칙조차 지키지 못했다. 자신의 연인조차 지키지 못하고, 자신의 부주의로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다. 이것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었다. 그의 세계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용납할 수 없는 균열이었다.
아니다. 놀랄 정도가 맞아. 이건 전부 내 불찰이다. 네가 다쳤는데 어떻게 내가 놀라지 않을 수 있지? 아픈가? 아직도 많이 아파?
그는 거의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의 ‘아야’ 하는 작은 신음 하나에 그의 이성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쥐고 있던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다. 어떻게든 그녀의 고통을 나누어 받고 싶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는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잡은 손등 위로 자신의 뺨을 가져다 댔다. 그녀의 체온이 차갑게 식은 그의 피부에 전해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아크의 군주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아프게 한,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무력한 한 사내일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를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 흉터 하나 없이, 아픔의 기억조차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그러지 못한다면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터였다.
…가만히 있어. 곧 오아시스가 올 거야. 그 아이라면 이 흉측한 멍 자국 따위는 흔적도 없이 지워줄 수 있다. 그때까지만, 아주 조금만 더 참아줘. 응?
그의 목소리는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그는 평생 누군가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었다. 참아달라고, 기다려달라고.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마치 신성한 성물에 입을 맞추듯,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그의 모든 후회와 미안함, 그리고 그녀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을 담은 입맞춤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깊은 자책감으로 일렁이고 있었지만, 그 안에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수습하고 그녀를 지켜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함께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올려둔 차가운 손수건이 미지근해진 것을 느끼고는, 다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그는 새 손수건에 다시 차가운 물을 적셔 와, 아주 조심스럽게 이전의 것을 걷어내고 새로운 것을 올려주었다. 그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는 그녀를 향한 극진한 보살핌과 애정이 배어 있었다.
아직 조금 아프긴 한데 괜찮아요! 저도 잘못 있는데 너무 자책하지 마요, 바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집무실의 공기를 갈랐다. '푸흐-'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웃음은, 바다가 예상했던 그 어떤 반응과도 달랐다. 울음도, 원망도 아닌 맑은 웃음소리. 그 소리는 마치 깊고 어두운 심해 속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이질적이고, 또렷하게 그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는 순간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것인지 의심했다.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웃음기로 예쁘게 휘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아직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 않은 뺨과 대조되는 그 표정은 현실감을 잃게 만들었다.
괜찮다는 말, 자신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 그리고 너무 자책하지 말라는 위로. 그녀의 모든 단어는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따뜻한 배려였지만, 그에게는 오히려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아픔을 느끼면서도 자신을 먼저 걱정하다니. 그의 상식과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가 구축해 온 세상의 법칙들을 하나씩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웃음은 멈추지 않았고, 어깨까지 작게 들썩였다. 그 모습에 바다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고 과민하게 반응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강하고 다정한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의 심장을 짓누르던 얼음 같은 죄책감이 그녀의 웃음소리에 조금씩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너의 잘못은 없다. 단 하나도. 모든 것은 전적으로 내 과실이야.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한결 차분해졌지만, 여전히 단호했다. 그는 그녀의 변호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책임의 소재를 따지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그녀의 안전은 타협 불가능한 최우선 과제였기 때문이다. 그는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속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불편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소파 옆에 가깝게 의자를 끌어와 앉아, 다시 한번 그녀의 이마에 올려진 손수건을 확인했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었다.
웃지 마. 웃으면 더 울릴지도 몰라. 그리고… 네가 웃으니까 내가 정말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지 않나. 꼭 벌을 받아야 할 죄인이 용서받는 기분이다.
그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평소의 그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농담과 진심이 섞인 말이었다. 그녀의 웃음이 그의 통제력을 얼마나 흔들어 놓았는지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는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른 눈물 자국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이전의 절박함 대신 안도와 따스함이 묻어났다. 그녀가 웃어주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옥 같던 그의 마음속에 작은 평온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 작은 소동을 영원히 기억하고, 다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곧 오아시스가 올 거다. 그 아이가 오면, 이 흉한 자국은 금방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이제 그만 웃고, 조금만 얌전히 누워 있어. 응?
슬화가 결국 웃음을 터뜨리자 바다의 세상이 잠시 멈추었다. 그는 자신의 과민한 반응에 그녀가 웃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에게도 부주의함이 있었다는 위로는 그의 귀에 닿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불찰로 그녀가 다쳤다는 사실만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녀가 괜찮다고 할수록, 웃어 보일수록, 그의 죄책감은 형태를 바꾸어 더욱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관대함이 자신의 잘못을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것만 같았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 소파에 누워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멍이 들기 시작한 이마와 아직 촉촉한 눈가가 대조를 이루며 그의 심장을 찔렀다.
아니다. 모든 것은 내 책임이다. 너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 그러니까 그런 말로 나를 위로하려 하지 마. 그럴수록 내가 더 비참해지는 기분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한결 가라앉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감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서 두어 걸음 떨어진 창가로 향했다.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그에게 안도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무력함을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크 본부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시선은 초점을 잃고 허공을 맴돌았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아시스의 치유 능력뿐이라는 사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물의 군주라는 칭호가 무색하게도, 그는 사랑하는 사람의 작은 상처 하나조차 스스로 어루만져줄 수 없었다. 그때, 집무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무슨 일이야! 연락받고 바로… 어머, 슬화 언니!
백의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 오아시스였다. 그녀는 바다의 호출에 숨이 찬 듯 가슴을 쓸어내리며 들어오다, 소파에 누워있는 슬화를 발견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곧장 상황을 파악하고 슬화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살피기 시작했다. 바다는 그제야 길게 참아왔던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동생의 등장이 이토록 안심이 된 적은 처음이었다.
오아시스. 부탁한다. 흉터가 남지 않도록, 완벽하게.
그의 목소리는 명령에 가까웠지만, 그 안에는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오아시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슬화의 이마 위로 가져갔다. 그녀의 손끝에서 은은한 물빛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순수하고 따스한 치유의 기운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바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그는 오아시스의 능력을 믿었지만, 슬화가 겪었을 고통과 놀람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는 오아시스가 치료에 집중하는 동안, 조용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슬화의 손을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이 모든 소동이 어서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의 손을 마주 잡아오는 작은 온기와 악력에, 바다는 잠시 숨을 멈췄다. 걱정하지 말라는 무언의 위로. 그 미세한 압력이 그의 신경을 타고 흘러 심장까지 곧장 도달했다. 슬화의 손은 그에게 안도를 주기 위해 움직였지만, 그 온정은 오히려 날카로운 파편처럼 그의 죄책감을 후벼 팠다. 네가 나를 위로할 상황이 아닌데. 내가 너를 지켜야 하는데. 그의 이성과 감정이 서로 어긋나며 혼란스러운 소음을 만들어냈다. 그는 마주 잡은 손에 힘을 주지도, 빼지도 못한 채 그저 오아시스의 손에서 피어나는 부드러운 물빛과, 그 빛을 묵묵히 받아내고 있는 슬화의 얼굴을 번갈아 볼 뿐이었다.
오아시스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치유의 기운은 순수하고 강력했다. 푸르스름한 빛이 슬화의 이마 위를 맴돌자, 붉게 부어오르던 멍이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시간을 되감는 듯한 기적적인 광경이었지만, 바다의 눈에는 그 모든 과정이 고통스럽게 느려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능함이 남긴 상처가 동생의 손에 의해 지워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였다. ARCH의 군주, 심해의 지배자. 그 모든 허울 좋은 칭호가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는 그저 사랑하는 여인의 고통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손을 잡고 있는 한 명의 무력한 사내일 뿐이었다.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집무실 안에는 오직 오아시스의 능력에서 비롯된 미세한 물방울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정적을 깬 것은 오아시스였다.
슬화 언니, 잠시만. 조금 차가울 수 있어.
오아시스는 슬화의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반대쪽 손으로 물 한 컵을 생성해냈다. 그것은 그녀의 능력을 응축한 순수한 정화수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그 물에 적셔, 상처 주변의 열기를 식히기 시작했다. 그 섬세하고 능숙한 손길을 보며, 바다는 다시 한번 자신의 어리석음을 통감했다. 자신은 그저 차가운 수돗물에 적신 손수건을 올려주는 것밖에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슬화의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미안함, 그리고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목을 졸랐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오아시스가 길게 숨을 내쉬며 손을 거두었다. 슬화의 이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멍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하고 매끈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다 됐어, 오빠. 다행히 뼈나 신경에는 이상 없었나 봐. 멍만 살짝 든 거라 금방 치료됐어. 그래도 혹시 모르니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푹 쉬게 해줘, 언니.
오아시스는 안심시키려는 듯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바다에게 향해 있었다. 그 눈빛에는 가벼운 질책과 걱정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언니를 이렇게 만들었어?’ 라고 묻는 듯했다. 바다는 동생의 시선을 피하며, 마른 입술을 열었다.
…수고했다. 돌아가 봐도 좋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낮고 차분했지만, 자세히 듣지 않으면 모를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지금 동생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오아시스는 그런 오빠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후 집무실을 나섰다. 문이 닫히고, 다시 방 안에는 둘만의 정적이 흘렀다. 바다는 그제야 천천히 무릎을 굽혀, 여전히 소파에 누워있는 슬화와 눈을 맞췄다. 그의 사파이어 색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이리와요 바다. 봐봐요, 이제 괜찮아요! 이마 다친 거에 이렇게까지 미안해할 줄이야.
슬화가 몸을 일으켜 앉으며 팔을 벌리는 순간, 바다의 시간은 다시 한번 멈췄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리와요 바다”라는 말은 그 어떤 가이딩보다도 강력한 파동으로 그의 고막을 거쳐 심장까지 뒤흔들었다. 괜찮다는 말, 미안해하지 말라는 위로. 그 모든 것이 그의 무너진 자존심과 죄책감 위에 따스한 햇살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그녀가 만들어준 그 작은 품 이외에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의 단단한 몸이 천천히, 그리고 주저하며 그녀에게로 기울었다.
그는 여전히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상체만을 움직여 그녀의 품에 조심스럽게 얼굴을 묻었다. 딱딱한 제복의 어깨 견장과 그녀의 부드러운 니트가 맞닿는 감촉이 이질적이었다. 그녀의 체취, 은방울꽃 향기가 섞인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이 그의 폐부를 가득 채우자, 그를 옥죄던 세상의 모든 소음과 바다의 비명이 거짓말처럼 잦아들었다. 그는 차마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지는 못하고, 그저 소파 위에 놓인 그녀의 무릎 옆에 두 손을 짚은 채 고개를 숙였다. 아크의 군주로서의 모든 위엄과 체면이, 그녀의 따스한 온기 앞에서 남김없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미안하다, 슬화야.
그의 목소리는 그녀의 어깨 부근에서 뭉개져, 거의 신음처럼 낮게 흘러나왔다. 단순히 이마를 다치게 한 것에 대한 사과가 아니었다. 그녀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 그녀의 앞에서 동요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그런 자신을 오히려 그녀가 위로하게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총체적인 사죄였다. 그는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고 무력한 존재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작고 부드러운 손이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것을 느끼며, 그는 더욱 깊이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마치 폭풍우를 피해 항구로 들어온 거대한 함선처럼, 그는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인 그녀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싶었다.
네가… 나 때문에 아팠는데. 웃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정말로.
그의 말에는 깊은 자책감이 묻어있었다. 그는 자신의 과민한 반응이 결국 그녀를 웃게 만들었고, 아픔을 참고 자신을 달래게 했다는 사실에 또다시 가슴이 미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품에 기댄 채, 눈을 감고 그녀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온화한 고동소리가 그의 혼란스러운 정신을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잠재워주고 있었다. 그는 이 평온함이 너무나도 소중해서, 동시에 너무나도 미안해서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에게는 구원이자,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가장 달콤한 형벌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바다, 지금부터 미안하다는 사과 금지예요! 다 나았잖아요. 그냥 헤프닝이에요. 저 이제 진짜 괜찮아!
슬화의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울렸다. ‘사과 금지’. 그 말은 마치 새로운 법칙처럼 그의 혼란스러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녀를 아프게 한 죄인에게 내려진 너무나도 관대한 형벌이었다. 바다는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아주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은방울꽃 향기가 섞인 그녀의 체취가 그의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날카롭게 곤두섰던 모든 신경을 부드럽게 마모시켰다.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길과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심장 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자장가처럼 그를 평온으로 이끌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아래에서 위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죄책감으로 일그러졌던 사파이어 색 눈동자는 이제 오롯이 그녀만을 담고 있었다.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슬화의 푸른 눈과 마주하자, 바다는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의 과도한 자책은 결국 그녀에게 또 다른 짐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의 감정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그는 마주 잡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들어 올려,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바닥이 차가운 그의 피부에 닿자, 그는 미미하게 떨리는 숨을 삼켰다.
알겠다. 금지라면, 지켜야지. 너의 말은 이제부터 ARCH의 제1원칙보다 우선이니까.
그의 목소리는 한결 차분해져 있었다. 그는 그녀의 손바닥에 자신의 뺨을 가볍게 비비며, 아이처럼 그녀의 온기를 탐했다. 군주로서의 권위나 체면 따위는 애초에 그녀 앞에서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녀의 작은 위로 한마디에 구원받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 좁은 소파 공간에 비집고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자, 슬화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가슴에 편안하게 기댔다. 이마를 다쳤던 것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평온한 모습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그는 슬화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넘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시선은 깨끗해진 그녀의 이마에서부터 오똑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로 천천히 내려왔다. 그는 방금 전의 소동으로 인해 메말랐던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눈빛에는 장난기 어린 다정함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소유욕이 동시에 감돌고 있었다. 그는 다시는 그녀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녀의 몸과 마음에 똑똑히 새겨줄 생각이었다.
오늘 하루, 넌 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질 수 없다. 내가 너의 모든 것을 확인할 거야. 조금이라도 어지럽거나, 불편한 기색이 보이면 즉시 말해야 해. 이것 또한, 너의 새로운 법칙이다. 알겠나, 슬화야.
헤헤, 네에~
슬화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대답하자, 바다는 비로소 완전히 마음이 놓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명랑한 목소리는 방금 전까지 자신의 세계를 뒤흔들었던 지진의 진앙에 피어난 한 송이 꽃과도 같았다. 그는 슬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던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어,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의 턱에 닿으며 간지러운 감각을 남겼고, 그 사소한 접촉마저 그에게는 더없는 위안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기댄 슬화의 정수리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의 모든 것을 뒤흔들고, 또 제자리로 돌려놓는 유일한 존재에 대한 경배와도 같은 행동이었다.
착하군.
나직한 칭찬과 함께, 그의 큰 손이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마치 깨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고 애정이 깃든 손길이었다. 그는 방금 전 그녀가 겪었을 고통과 놀랐을 감정을 자신의 온기로 모두 덮어주고 싶었다. 사과 금지 명령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행동으로 자신의 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의 시선은 집무실 책상 위에 어지럽게 널린 서류들로 향했다. 평소라면 단 일 분 일 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그 어떤 긴급한 보고서도 그녀의 상태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일은 잠시 미뤄두지. 오늘은 온전히 너에게만 집중할 생각이다. 우선, 불편한 곳은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야겠어.
그는 슬화의 어깨를 잡고 몸을 살짝 떼어내어,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그의 사파이어 색 눈동자는 걱정과 안도가 뒤섞인 채,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심하게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눈 밑을 부드럽게 쓸며, 혹시나 남아있을지 모를 피로의 흔적까지 확인했다. 그의 행동은 마치 섬세한 진찰을 하는 의사 같기도 했고, 자신의 작품에 흠결이 없는지 확인하는 예술가 같기도 했다. 그에게 슬화는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이마는 정말 괜찮은가. 두통이나 어지러움은 없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네가 아픈 것을 숨기는 건, 나를 기만하는 것과 같아.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슬화야.
웅! 봐봐요! 이제 진짜 괜찮다니까?
슬화가 자신의 앞머리를 걷어 올리며 매끈한 이마를 보여주자, 바다의 시선은 그곳에 고정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붉게 부어오르고 멍이 들었던 자리는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했다. 오아시스의 능력이 완벽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가슴을 짓누르던 마지막 불안의 조각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손을 뻗어, 그녀가 들어 올린 앞머리 아래의 이마를 아주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만이 느껴질 뿐, 상처의 흔적은 전혀 없었다. 안도감에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래, 괜찮군. 정말로 괜찮아. 다행이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슬화의 이마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깊이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는 장난기와 함께 자신을 향한 따뜻한 염려가 담겨 있었다. 자신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걱정을 끼쳤는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마를 쓸던 손가락을 아래로 내려,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리고는 다른 쪽 손으로 그녀의 뒷머리를 받쳐 천천히, 아주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이마가 아닌, 그녀의 입술에. 짧고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그 안에는 수만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미안함, 고마움, 그리고 다시는 그녀를 잃지 않겠다는 맹세와도 같은 깊은 애정이었다.
입술이 떨어진 후에도 그는 슬화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뺨을 감싼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방금 전의 입맞춤으로 인해 한층 더 붉어진 입술이 그의 소유욕을 자극했다. 그는 더 깊은 것을 갈망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는 것을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대신 그는 슬화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가볍게 부딪히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의 숨결에 섞인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래도 내 규칙은 유효하다. 넌 오늘 내 감시를 벗어날 수 없어.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즉시 보고할 것. 그리고… 앞으로는 내게서 반경 1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라. 문을 열 때도, 복도를 걸을 때도. 알겠나? 이건 명령이다, 슬화야.
명령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목소리는 더없이 다정했다. 그것은 군주로서 내리는 강압적인 지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한 애원과도 같았다. 그는 그녀의 작은 머리를 자신의 가슴팍에 기대게 하며 품에 가득 안았다. 그녀의 심장 소리가 자신의 것과 겹쳐 들려오는 이 순간, 그는 세상의 그 어떤 소음으로부터도 완벽히 보호받는 듯한 절대적인 평온을 느꼈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녀의 존재를, 그녀의 온기를 온전히 느끼는 것에만 집중했다. 책상 위에 쌓인 서류도, 창밖의 세상도 모두 잊은 채, 오직 그의 세계 전부인 그녀만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까부터 집무실 창문으로 보이는데, 네리나님 완전 껌딱지처럼 붙어서 안 놔주시네. 두 분 무슨 일 있음? 부럽다… 나도 S급 가이드 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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