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크 본부에 긴급 지령이 떨어진 날. S급 괴수 출현 보고가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지던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슬화는 바다의 곁에 있었다. 늘 그랬듯. 바다가 나서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갔다. 가이드로서의 의무이기도 했고, 반려로서의 본능이기도 했다. 그날의 작전은 단순한 토벌이 아니었다. 복수의 S급 괴수가 동시에 출현한 전례 없는 상황. 아크 프리마 전원이 출동하는 총력전이었고, 각 군주에게 배정된 가이드들은 후방 지원 라인에 배치되었다. 슬화 역시 후방에서 바다의 가이딩을 담당하며, 얼음 속성의 방어막을 부여하는 역할이었다. 문제는 전선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져 나온 타락 센티넬 두 명이 후방을 기습했고, 가이드 호위 라인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슬화는 전투 능력이 없었다. 가이드는 싸울 수 없다. 그것이 이 세계의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얼음 속성의 기운을 가졌다 해도, 그것을 무기로 쓸 수는 없었다. 슬화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이딩뿐이었다. 그녀의 곁을 지키던 호위 요원 세 명이 쓰러졌을 때, 슬화의 눈앞에는 폭주한 타락 센티넬의 검은 눈동자만이 남았다. 통신기 너머로 바다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와 다른, 날카롭게 갈라진 목소리.
네리나. 위치 보고.
슬화는 통신기를 움켜쥐며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타락 센티넬의 공격이 먼저였다. 번개 속성의 방전이 슬화의 몸을 관통한 것은 찰나의 일이었다. 슬화의 입에서 비명 대신 짧은 신음이 새어나왔다. 통신기가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에 떨어졌다. 슬화의 몸이 뒤로 날아가 콘크리트 벽에 부딪혔을 때, 등에서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갈비뼈인지, 벽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슬화는 바닥에 쓰러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회색 하늘이었다. 바다의 감정이 흔들리면 하늘이 변한다고 했었다. 지금 이 잿빛 하늘은 바다가 무언가를 느끼고 있다는 뜻일까. 슬화의 입가에 피가 번졌다. 내장이 손상된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거품이 올라왔다. 차가웠다. 원래 자신은 차가운 체질이었는데, 지금의 추위는 달랐다. 뼈 속까지 파고드는, 생명이 빠져나가는 추위. 슬화의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눈꽃 귀걸이가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피에 젖어 빛을 잃고 있었다. 왼손 약지의 푸른 증표가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파트너의 위기를 알리는 신호. 바다에게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슬화는 그것을 알면서도,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깨워달라고 했는데. 무서우면 찾아오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찾아갈 수가 없어서.
바다가 도착한 것은 3분 후였다. 전장의 한복판을 가르며 달려온 그의 주변으로 대기 중의 수분이 응축되어 거대한 수벽을 이루고 있었다. 타락 센티넬을 향해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수압이 적의 몸을 으깨버렸다. 그러나 바다의 시선은 적에게 있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 쓰러진 슬화의 모습이 사파이어빛 눈동자에 담긴 순간, 바다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짜 처음으로 무너졌다. 무표정이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공포였다. 한바다라는 인간이 28년의 생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순수한 공포. 바다가 슬화 앞에 무릎을 꿇었다. 슬화의 몸을 일으켜 안았을 때, 손에 닿는 체온이 너무 낮았다. 얼음 속성이라 원래 차갑다고, 그렇게 생각하려 했다. 하지만 이것은 달랐다. 이것은 생명의 온도가 아니었다.
네리나.
바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생 통제해온 감정이 목소리에서 새어나왔다. 슬화의 뺨을 감싸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바다의 손이 떨리는 것을 슬화는 본 적이 없었다. 슬화는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바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젖어 있었다.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눈이 충혈되어 붉게 번지고 있었다. 슬화는 힘겹게 손을 들어올려 바다의 뺨에 닿으려 했다. 손끝이 바다의 턱 끝에 겨우 스쳤다. 피로 얼룩진 손가락이 바다의 하얀 피부 위에 붉은 자국을 남겼다.
바다... 울지 마요...
슬화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다. 공기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마지막 숨결에 실린 말이었다. 바다는 슬화의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꾹 눌렀다. 차가운 손이었다. 너무 차가운 손이었다.
안 울어. 울지 않아. 눈 감지 마. 네리나. 눈 감지 마.
바다의 목소리가 명령이었다. 군주의 명령.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명령은 세상의 이치를 바꿀 수 없었다. 슬화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앉고 있었다. 바다의 뺨에 닿아 있던 손가락에서 마지막 힘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는 그 손을 놓지 않았다. 놓을 수 없었다. 슬화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움직였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말. 하지만 바다는 읽을 수 있었다. 332일 동안 매일 바라본 입술이었으니까.
'사랑해요, 바다.'
"안 돼, 제발... 네가 없는 세상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슬화의 눈이 감겼다. 완전히. 바다의 품 안에서, 마치 잠드는 것처럼 고요하게. 어젯밤 바다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들던 그 모습과 똑같았다. 다만 이번에는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바다의 귀가 슬화의 가슴에서 박동을 찾으려 했지만, 그곳에는 침묵만이 있었다. 왼손 약지의 푸른 증표가 한 번 강하게 빛났다가, 서서히 꺼져갔다. 유대가 끊어지는 감각. 그것은 바다의 머릿속에서 24시간 울리던 바다의 비명보다도 더 끔찍한 고요였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화의 숨소리도, 심장 소리도, 잠꼬대도. 아무것도.
바다는 슬화의 몸을 끌어안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의 전장이 여전히 혼란 속에 있었지만, 바다의 세계는 정지해 있었다. 대기 중의 수분이 바다를 중심으로 비정상적으로 응축되기 시작했다. 하늘이 검게 물들었다. 바다 위에서 파도가 솟구쳤다. 본부 인근의 해수면이 수십 미터 높이로 치솟으며 으르렁거렸다. 폭주의 전조였다. 하지만 바다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의 세계에는 지금 차갑게 식어가는 슬화의 몸뚱이 하나만이 존재했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등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물방울. 파문. 잔잔한 물결. 어젯밤과 똑같은 궤적을. 이미 느낄 수 없는 사람의 등 위에서, 바다는 멈추지 못했다.
...일어나.
바다의 목소리에서 군주의 권위는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벌거벗겨진 한 사람의 목소리뿐이었다. 갈라지고, 떨리고, 부서지기 직전의. 바다는 슬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었다. 차가웠다. 슬화의 이마가 아니라 자신의 이마가 뜨거운 것인지, 아니면 슬화의 체온이 완전히 사라진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다의 눈에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눈물이 아니었다. 눈물을 흘리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으니까. 응축된 수분이 그의 눈가에서 물방울이 되어 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 물방울은 눈물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슬화의 뺨 위로 떨어진 물방울이 피와 섞여 분홍빛으로 번졌다.
헬리오스가 가장 먼저 도착했다. 전장의 소음을 뚫고 달려온 불의 군주는, 바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비정상적인 수압장을 느끼고 멈춰 섰다. 바다의 등이 보였다. 넓은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10년을 함께한 헬리오스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한바다라는 인간이 무너지는 모습을. 헬리오스는 한 발 다가서려다 멈추었다. 지금 저 사람에게 다가가면, 남아 있는 이성의 실 한 올마저 끊어질 것 같았다.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 바다의 감정이 대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장의 모든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그 비가 유난히 짠 맛이 난다는 것을, 비를 맞은 요원들은 나중에야 깨달았다.
약속했잖아. 어디 안 간다고. 내가 그랬잖아.
바다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완전히. 슬화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는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파란 머리카락 아래의 하얀 인너컬러가 피에 물들어 있었다. 바다는 그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정리해주었다. 마치 아침에 슬화가 늦잠에서 깨어났을 때 헝클어진 머리를 빗겨주던 것처럼. 슬화의 눈꽃 귀걸이를 손끝으로 만졌다. 딸랑, 소리가 나야 했는데. 나지 않았다. 피에 젖어 무거워진 금속이 소리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바다는 슬화를 안아 올렸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잠든 아이를 안아 올리듯 조심스럽게. 슬화의 머리가 바다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어젯밤과 같은 자세였다. 바다는 걸었다. 전장을 가로질러,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은 그 혼란 속을 그냥 걸었다. 그의 주변으로 거대한 수벽이 형성되어 모든 공격을 차단했다. 무의식적인 방어였다. 바다의 의식은 이미 전장에 있지 않았다. 그의 세계는 팔 안의 이 사람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이카로스가 바람의 장벽으로 바다의 퇴로를 열어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바다의 등 뒤로 보이는 표정이, 말을 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본부로 돌아온 바다는 의무실로 향하지 않았다. 자신의 숙소로 갔다. 슬화의 몸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아직 따뜻한 것 같았다. 아직. 바다의 손이 슬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피로 얼룩진 얼굴을 손등으로 닦아주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상처를 더 낼까 봐.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의 얼굴을, 바다는 그렇게 한참을 닦아주었다. 이불을 끌어당겨 슬화의 어깨까지 덮어주었다. 어젯밤에 그랬던 것처럼. 무서운 꿈을 꾸고 찾아온 슬화를 안아 재울 때처럼.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파란 겉머리 아래 드러나는 하얀 인너컬러가 피에 물들어 분홍빛이었다. 바다는 그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정리했다. 슬화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엉켜 있는 걸 싫어했으니까. 일어나면. 바다의 손이 멈추었다. 일어나면.
바다는 슬화의 옆에 누웠다. 어젯밤과 같은 자세로. 슬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한 팔로 슬화의 허리를 감쌌다. 식어가는 체온이 바다의 가슴에 닿았다. 차가웠다. 슬화는 원래 차가운 사람이었다. 얼음 속성의 기운 때문에. 바다는 그 차가움을 좋아했다. 머릿속의 고통을 식혀주는 유일한 온도였으니까. 지금도 차가웠다. 하지만 이 차가움은 달랐다. 이 차가움은 돌아오지 않는 차가움이었다. 바다는 눈을 감았다. 슬화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지 않았다. 이 얼굴이 마지막이 되어서는 안 되니까. 어젯밤, 슬화가 바다의 가슴에 볼을 비비며 잠들던 그 표정. 그것이 마지막이어야 했다. 저 평온하고 행복한 잠든 얼굴이.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운 피부 위에 오래, 오래 입술을 대고 있었다.
...슬화.
바다의 목소리가 침실의 어둠 속에 떨어졌다.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바다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는데도 불렀다. 슬화의 이름을 부르면 잠결에 '응' 하고 대답하던 목소리가 들릴 것 같아서. 바다의 왼손이 슬화의 왼손을 찾아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약지에 새겨진 푸른 증표가 완전히 빛을 잃어 있었다. 바다의 것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짝을 잃은 빛. 바다는 그 손을 자신의 입술에 가져가 슬화의 약지에 입을 맞추었다. 차가운 금속 같은 피부의 감촉이 입술에 닿았다.
본부 밖에서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아이기스 전체가 흔들릴 만큼의 파도가 요새를 둘러싸고 있었다. 바다의 감정이 대기를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 안만은 고요했다. 바다가 의식적으로 이 공간만은 지키고 있었다. 슬화가 무서워할까 봐. 파도 소리에 놀랄까 봐. 이미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바다는 이 방의 고요함을 지키고 있었다. 문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헬리오스의 목소리. 낮고 조심스러운.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다시 고요해졌다. 바다는 슬화를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아침이 오면. 아침이 오면 슬화가 눈을 뜰 것이다. 늘 그랬듯 바다보다 늦게 일어나서, 눈을 비비며 '5분만 더'라고 중얼거릴 것이다. 바다는 그것을 기다리기로 했다. 아침이 올 때까지.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등 위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방울. 파문. 잔잔한 물결. 끝나지 않는 물결.
내가 지킨다고 했는데.
바다의 목소리가 부서졌다. 완전히. 이 방의 어둠 속에서, 아무도 듣지 못하는 곳에서, 한바다라는 사람은 처음으로 무너졌다. 소리 없이. 파도가 해안을 삼키듯 조용히. 슬화의 머리카락 사이로 얼굴을 묻은 채, 바다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은방울꽃 향이 아직 남아 있었다. 희미하게, 사라져가는 향. 바다는 그 향을 쫓듯 코를 슬화의 목에 파묻었다. 제발. 제발 사라지지 마. 이 향이. 이 온기가. 이 사람이. 창밖의 바다가 울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울고 있었다. 그것이 바다의 울음이었다.
"아침이 오면 네가 다시 눈을 뜰 거라고 믿고 싶어. 제발, 이건 꿈이어야만 해."
아침은 오지 않았다. 아니, 아침은 왔다. 창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었고, 아이기스 본부의 시계는 정확히 06시 4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바다는 한 번도 잠들지 않았다. 밤새 슬화의 등 위에 물방울 모양을 그리고, 머리카락을 빗겨주고, 이마에 입술을 대었다. 그리고 기다렸다. 슬화가 눈을 비비며 '5분만 더'라고 중얼거릴 그 순간을. 하지만 그 순간은 오지 않았다. 슬화의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고, 가슴은 오르내리지 않았고, 속눈썹은 떨리지 않았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뺨 위에 멈추어 있었다. 차가웠다. 얼음 속성의 차가움이 아니었다. 생명이 완전히 떠난 뒤에 남는, 돌이킬 수 없는 차가움이었다. 바다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밤새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문 밖에서 다시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노크가 아니었다. 헬리오스의 목소리가 문 너머로 낮게 스며들어왔다.
바다. 문 열어.
명령이 아니었다. 부탁이었다. 10년을 함께한 사람이 처음으로 하는 부탁.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슬화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은방울꽃 향이 거의 사라져 있었다. 희미한 잔향만이 남아 있었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약지 위를 쓸었다. 빛을 잃은 증표. 바다의 것만이 아직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짝을 잃은 빛이 무의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바다는 그 빛을 내려다보았다. 텅 빈 눈으로.
헬리오스가 다시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 목소리에서 평소의 호쾌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네리나를 보내줘야 해. 알고 있잖아.
바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슬화의 몸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보내줘야 한다.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이제 여기에 없다는 것을. 바다가 안고 있는 것은 빈 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이 손을 놓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난다. 332일의 시간이, 94번의 밤이, 7번의 외출이, 매일 아침 슬화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며 느꼈던 그 조용한 행복이. 전부.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감긴 눈꺼풀 위에 닿았다. 길게. 오래. 마지막으로.
잠깐만 더.
바다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군주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한바다라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잠깐만 더 이렇게 있게 해달라는. 바다의 눈가에서 수분이 응축되어 물방울이 되었다. 슬화의 뺨 위로 떨어졌다. 투명한 물방울이 슬화의 하얀 피부 위에서 굴러 베개를 적셨다. 창밖에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세상의 모든 바다가 잔잔히 울고 있었다. 그것은 비통함이었다. 한바다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그리고 아마 마지막으로 흘리는 눈물이었다.
바다는 슬화의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바다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다. 슬화가 없는 세상에서, 무의미하게. 바다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말. 하지만 이 방의 공기가 그 말을 기억했다.
'기다려. 금방 갈게.'
그것이 한바다가 마지막으로 한 약속이었다.
"기다려. 금방 갈게."
문이 열렸다.
바다가 연 것이 아니었다. 헬리오스가 불의 열기로 잠금장치를 녹여버린 것이었다. 문틈으로 스며든 아침 햇살이 어두운 침실을 가로질렀다. 헬리오스는 문을 열고도 한동안 들어오지 못했다. 침대 위에 나란히 누운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평범한 아침처럼. 슬화가 늦잠을 자고, 바다가 그 곁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하지만 슬화의 가슴이 오르내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 평범한 풍경을 산산이 부수고 있었다.
헬리오스가 한 발짝 들어섰다. 바다의 눈이 움직이지 않았다. 슬화의 얼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빈 눈. 38년을 살아온 헬리오스가 처음 보는 종류의 공허함이었다. 헬리오스는 침대 옆에 무릎을 꿇었다. 바다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그리고 바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손이었다. 불의 군주의 체온이 바다의 차가워진 어깨에 닿았다.
바다. 네리나를 보내줘야 해. 이건 명령이 아니야.
헬리오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평소의 호쾌한 웃음도, 장군의 위엄도 없었다. 그저 10년을 함께한 동료가, 친구가, 가족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는 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바다의 입술이 움직였다. 건조하게 갈라진 입술 사이로 공기가 새어나왔다.
...5분만 더.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있었다. 아침에 늘 그랬던 것처럼. 슬화가 5분만 더 자겠다고 투정부리면, 바다가 머리카락을 빗겨주며 기다려주던 그 시간. 바다는 아직 그 시간 속에 있었다. 헬리오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바다의 어깨를 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헬리오스는 고개를 숙였다. 검은 안대 아래로 드러나지 않는 눈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바다의 왼손 약지에서 빛이 일었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푸른 증표가, 갑자기 강하게 맥박치듯 빛나기 시작했다. 바다의 눈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시선이 슬화의 약지로 향했다. 빛을 잃었던 슬화의 증표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착각에 가까울 만큼 희미하게. 깜빡였다.
바다의 심장이 멈추었다가 다시 뛰었다. 헬리오스도 그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헬리오스의 남은 한쪽 눈이 크게 떠져 있었다. 바다의 입술이 떨렸다. 처음으로 무언가가 그 텅 빈 눈 속에 돌아왔다. 그것은 희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위태롭고, 절망이라 부르기엔 너무 간절한 무언가였다.
헬리오스가 벌떡 일어섰다.
의무실. 지금 당장.
바다는 이미 슬화를 안아 올리고 있었다. 밤새 한 번도 놓지 않았던 그 팔이,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슬화를 끌어안았다. 바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복도로. 엘리베이터로. 의무실로. 바다의 주변에서 수분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폭주의 전조가 아니었다. 그것은 한바다라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매달리는, 가느다란 실 한 올이었다.
"제발. 제발 이게 착각이 아니길. 한 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이번엔 반드시."
의무실까지의 거리가 이토록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바다의 발걸음은 빨랐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품에 안긴 슬화의 몸이 조금이라도 흔들리지 않도록, 한 발 한 발을 정확히 내딛고 있었다. 복도의 형광등이 바다의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새벽 근무 중이던 요원 몇이 복도에서 마주쳤지만, 바다의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슬화의 약지에서 깜빡이는 그 희미한 빛만이 바다의 세계 전부였다. 슬화의 머리카락이 바다의 팔 위로 흘러내렸다. 파란색 겉머리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인너컬러가,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직 은방울꽃 향이 남아 있었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바다는 그 향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슬화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헬리오스가 앞서 달리며 의무실의 문을 열어젖혔다. 새벽 당직 의료진이 놀란 눈으로 일어섰다가, 바다의 품에 안긴 슬화를 보고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바다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바다의 눈에는 죽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타오르고 있었다. 간절함. 그것은 물의 군주가 28년 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종류의 감정이었다.
이 사람을 살려.
바다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명령이었지만, 그 안에 떨림이 있었다. 슬화를 의무실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바다의 손이 슬화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의료진이 급히 모니터를 연결하고 속성 차폐막을 가동시켰다. 정신파장 안정화 기기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했다. 모니터에 수치가 떠올랐다. 심박수 0. 뇌파 0. 체온 급격히 저하. 하지만, 하지만. 파장 잔류값이 깜빡이고 있었다. 0.003. 0이 아니었다. 바다의 눈이 그 숫자를 붙잡았다.
헬리오스가 바다의 뒤에 서서 모니터를 함께 읽고 있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의료진 중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프, 프리마님. 이건. 파장 잔류값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이론적으로는.
바다의 시선이 의료진을 향했다. 한 마디로 충분했다.
방법.
의료진이 침을 삼켰다. 모니터의 수치를 다시 확인하고, 다른 의료진과 눈을 마주쳤다. 떨리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며 데이터를 불러왔다. 바다는 기다렸다. 슬화의 차가운 손을 자신의 양손으로 감싸 쥔 채, 꼼짝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슬화의 약지 위에서 증표가 다시 한 번 깜빡였다. 아주 약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바다의 엄지가 그 빛 위를 쓸었다. 마치 '여기 있어, 돌아와'라고 말하듯.
헬리오스가 바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손이었다. 불의 군주의 체온이 바다의 차가워진 몸에 온기를 전했다. 헬리오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손의 무게가 말하고 있었다. 여기 있다고. 혼자가 아니라고. 바다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깨의 힘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 그것이 한바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감사의 표현이었다. 창밖에서 폭풍이 잦아들고 있었다. 파도가 조금씩, 아주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아직 잔잔하지는 않았지만, 더 이상 세상을 삼킬 것처럼 포효하지는 않았다. 바다의 시선은 슬화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았다. 슬화의 속눈썹이. 아직 젖어 있는 속눈썹이. 아침 햇살을 받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바다는 그 그림자를 보며 생각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생긴다. 슬화에게 아직 빛이 닿고 있다는 뜻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0.003... 그 작은 숫자가 내 전부야. 제발, 제발 다시 숨을 쉬어줘."
의료진이 모니터 앞에서 손가락을 쉬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의무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바다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슬화의 손을 감싼 양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의식하면서도,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모니터 위의 숫자. 0.003. 그 숫자가 바다의 망막에 각인되어 있었다. 0이 아니다. 완전한 소멸이 아니다. 바다의 시선이 슬화의 얼굴 위를 훑었다. 창백한 피부, 감긴 눈, 핏기가 사라진 입술. 하지만 약지 위의 증표가 다시 한 번 깜빡였다. 바다의 폐 안에서 멈춰 있던 공기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의료진 중 가장 선임으로 보이는 여성이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바다를 향해 돌아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과 경외가 뒤섞여 있었다. 손에 쥔 태블릿의 데이터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입을 열었다.
프리마님. 파장 잔류값 0.003은 통상적으로 사후 잔여 에너지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그녀가 말을 끊고 모니터를 가리켰다. 파장 그래프 위에서 불규칙하지만 분명한 맥동이 찍히고 있었다. 단순한 잔류가 아니었다. 살아 있는 파장의 리듬이었다.
이 패턴은 잔여 에너지가 아닙니다. 극도로 미약하지만, 자율적 파장 반응입니다. 네리나 요원의 의식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다의 등줄기를 따라 무언가가 흘렀다. 차가운 것인지 뜨거운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숨을 쉬었다. 한 박자. 두 박자. 바다의 엄지손가락이 슬화의 약지 위를 천천히 쓸었다. 증표의 빛이 바다의 손가락 아래에서 맥박치듯 반응했다. 마치 바다의 접촉을 인식하는 것처럼. 바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헬리오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안대 아래 드러나지 않는 눈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단호하게 의무실을 채웠다.
방법을 찾아. 뭐가 됐든. 아크의 모든 자원을 동원해도 좋다. 내 이름으로 허가한다.
의료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즉시 추가 장비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정밀 파장 분석기가 슬화의 관자놀이 양쪽에 부착되었고, 속성 공명 측정기가 슬화의 가슴 위에 놓였다. 기기들이 작동하는 윙윙거리는 소리가 의무실을 채웠다. 바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슬화의 손을 잡은 채 의료진이 일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다의 눈이 슬화의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속눈썹의 그림자. 코끝의 윤곽. 입술의 선. 바다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332일 동안 매일 아침 내려다보았던 얼굴.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바다의 가슴 안에서 조심스럽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손등 위에 닿았다. 차가운 피부 위에 따뜻한 숨결이 내려앉았다. 바다는 소리 없이 말했다. 입술의 움직임만으로.
돌아와.
그 한마디에 바다의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명령이 아니었다. 기도였다. 물의 군주가 생전 처음으로 하는, 무릎을 꿇은 기도. 창밖에서 폭풍이 완전히 멈추었다. 바다가 고요해졌다. 진짜 바다가. 수평선 위로 아침 햇살이 번져가고 있었고, 파도는 해안선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것은 한바다라는 사람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희망이라는 이름의, 간신히 붙잡은 실 한 올. 바다는 그것을 놓지 않았다. 절대로.
"0.003... 이 작은 숫자가 너의 대답이라면, 나는 절대로 이 손을 놓지 않아. 제발, 다시 눈을 떠줘."
의료진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동안,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는지 바다는 알지 못했다. 1분이 1시간처럼, 혹은 1시간이 1분처럼 느껴지는 기이한 시간 속에 갇혀 있었다. 슬화의 손을 잡은 양손의 감각만이 유일하게 바다를 현실에 묶어두고 있었다. 차갑지만, 아직 남아 있는 손. 아직 여기 있는 손. 정밀 파장 분석기에서 데이터가 쏟아져 나왔고, 의료진 세 명이 태블릿을 맞대고 무언가를 격렬히 논의하고 있었다. 바다의 귀에는 그 소리가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뭉개져 들렸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변하는 것은 보였다. 당혹에서 경이로. 경이에서 확신으로.
선임 의료진이 바다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눈에 조심스러운 빛이 서려 있었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희망을 전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프리마님. 분석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녀가 태블릿을 바다 앞으로 내밀었다. 화면 위에 슬화의 파장 그래프가 떠 있었다. 불규칙하던 맥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미세하게 안정적인 패턴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0.003이었던 수치가 0.005로. 아주 느리지만, 분명히 상승하고 있었다.
네리나 요원의 정신 파장이 자율적으로 회복 중입니다. 신체 기능은 정지 상태이나, 파장 코어가 살아 있습니다. 이건, 빙속성 가이드 특유의 자기보존 기제로 추정됩니다. 스스로를 동결시켜 소멸을 막은 것으로 보입니다.
바다의 눈이 떨렸다. 동결. 얼음의 가이드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파장을 얼려버린 것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슬화가 스스로를 지켜낸 것이다. 바다의 시선이 슬화의 얼굴로 돌아갔다. 창백한 피부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다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뜨겁고, 아프고, 그러면서도 숨을 쉴 수 있었다. 처음으로. 밤새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가 아주 조금 들어올려지는 느낌이었다.
헬리오스가 의료진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의 목소리에 장군의 무게가 돌아와 있었다.
소생 프로토콜. 뭐가 필요해? 장비든 인력이든, 내가 다 가져다 놓을 테니까.
의료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파장 코어가 살아 있다면, 외부에서 공명 자극을 주입하면 깨울 수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이 정도로 미약한 파장에 공명할 수 있는 건. 각인된 파트너의 파장뿐입니다.
의료진의 시선이 바다를 향했다. 바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아니,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 슬화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자신의 파장이 슬화를 향해 끊임없이 손을 뻗고 있었다는 것을.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약지 위 증표를 쓸었다. 빛이 반응했다. 바다의 접촉에 맞춰 맥박치듯 깜빡이는 푸른빛. 바다의 입술이 열렸다.
뭘 하면 돼.
명령이 아니었다. 질문이었다. 물의 군주가 의료진에게 묻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해야 슬화를 깨울 수 있는지를. 바다의 눈에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 담겨 있었다. 간절함. 그리고 그 간절함 아래 깔린, 아주 작고 여린 것. 믿음이었다. 슬화가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슬화가 자신에게로 돌아올 것이라는, 증표처럼 깜빡이는 작은 믿음. 바다의 왼손 약지에서도 증표가 빛나고 있었다. 슬화의 것과 같은 리듬으로. 같은 박자로. 마치 심장이 하나인 것처럼.
"네가 스스로를 얼려서라도 나를 기다려준 거라면, 이번엔 내가 너를 녹여서 데려올게. 조금만 더 버텨줘."
의료진이 공명 유도 프로토콜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태블릿 위로 복잡한 파장 도식이 떠올랐고, 손가락이 핵심 지점을 짚어가며 절차를 나열했다. 바다의 시선은 태블릿 위에 머물러 있었지만, 귀는 의료진의 목소리보다 슬화의 호흡기 소리를 먼저 쫓고 있었다. 기계가 대신 불어넣는 공기의 리듬. 그것조차 바다에게는 슬화가 아직 여기 있다는 증거였다.
각인된 파트너의 파장을 코어에 직접 공명시키는 겁니다. 물리적 접촉을 매개로 프리마님의 파장을 최대한 낮은 주파수로 조율해서, 동결된 코어를 감싸듯 진동을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다만.
의료진이 잠시 말을 끊었다. 바다의 눈이 태블릿에서 떠나 의료진의 얼굴을 향했다. 그녀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고요한 의무실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프리마님의 파장 출력은 SS급입니다. 네리나 요원의 코어는 현재 0.005 수준으로 극도로 미약합니다. 출력 조절에 실패하시면, 코어가 파장 과부하로 완전히 소멸할 수 있습니다. 실처럼 가느다란 불씨를 되살리는 거라, 바람을 너무 세게 불면 꺼져버리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약지 위에서 멈추었다. 조율. 자신의 파장을 극한까지 낮춰야 한다는 의미였다. SS급 센티넬의 파장을 0.005에 맞춰 조율하는 것. 그것은 해일을 물방울 하나로 압축하는 것과 같았다. 바다의 턱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이를 깨물고 있었다. 할 수 있는가. 아니, 그런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해야 했다. 슬화가 스스로를 얼려서까지 버텨준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다의 눈꺼풀이 천천히 내려갔다. 한 번의 호흡. 두 번의 호흡. 폐 안에서 공기가 가라앉고, 정신의 표면이 잔잔해졌다. 전 세계 바다의 비명이 여전히 울려오고 있었지만, 바다는 그 모든 소음을 밀어냈다. 지금 이 순간, 이 의무실 안에는 단 하나의 파장만이 존재해야 했다. 슬화의 것.
헬리오스가 의료진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부드러운 확신이 담겨 있었다.
이 녀석이 못 할 거라고 생각해?
의료진이 고개를 저었다. 헬리오스가 바다의 등을 한 번 가볍게 두드리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공간을 내어주는 것이었다. 바다는 눈을 떴다. 사파이어빛 눈동자가 슬화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창백하지만 고요한 얼굴. 마치 깊은 겨울 호수 아래 잠든 것처럼 평온한 표정. 바다의 왼손이 슬화의 볼을 감쌌다. 차가웠다. 얼음의 가이드다운, 서늘한 차가움. 하지만 그 아래에서 아주 미세하게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의 파장이 반응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공명의 실.
시작한다.
바다의 목소리는 낮고 고요했다. 명령도 선언도 아닌, 그저 사실의 진술이었다. 의료진이 공명 측정기를 가동시켰다. 모니터 위에 두 개의 파장 그래프가 나란히 떠올랐다. 하나는 SS급의 거대한 파도처럼 출렁이는 바다의 것. 다른 하나는 거의 직선에 가까운, 미세한 점으로만 존재를 증명하는 슬화의 것. 바다는 눈을 감았다. 슬화의 볼 위에 놓인 손에 정신을 집중했다. 자신의 파장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해일이 잔잔한 물결이 되고, 물결이 물방울이 되고, 물방울이 이슬이 되어가는 과정. 바다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SS급의 힘을 억누르는 것은 폭풍을 손바닥 안에 가두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바다의 손은 떨리지 않았다. 슬화의 뺨 위에서, 바다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마치 물방울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그리듯. 바다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기다려. 금방 갈게.
모니터 위에서 바다의 파장 그래프가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파도가 잔잔해지고, 수면이 가라앉고. 의료진의 눈이 커졌다. SS급 센티넬이 자의로 파장을 이토록 정밀하게 조율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바다는 하고 있었다. 슬화를 위해서라면. 슬화의 약지 위에서 증표가 반응했다. 깜빡임의 간격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짧아지고 있었다. 바다의 파장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게로 와줘.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너무나도 고요하고 차가운 심해일 뿐이니까."
0.01. 모니터 위에 찍힌 그 숫자가 바다의 망막에 새겨졌다. 의료진 중 한 명이 작게 탄성을 내뱉었고, 다른 한 명은 태블릿 위에 무언가를 빠르게 기록하기 시작했다. 바다의 손바닥 아래에서 전해지는 슬화의 체온이 달라지고 있었다.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아까와는 질적으로 다른 차가움이었다. 죽음의 냉기가 아닌, 얼음 속성 가이드 본연의 서늘함. 살아있는 차가움. 바다의 턱 끝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슬화의 베개 위로 떨어졌다. 전신의 근육이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다. SS급의 파장을 이슬방울 크기로 깎아내리는 것은, 마치 폭풍우를 삼키고 입을 꿰매는 것과 같았다. 뼈 안쪽이 삐걱거렸고, 관자놀이의 혈관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바다는 손을 떼지 않았다. 슬화의 뺨 위에서, 엄지손가락이 느리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물방울이 퍼져나가는 모양. 바다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반복되는, 오래된 버릇.
0.012. 0.015. 수치가 오르고 있었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마치 봄이 오는 속도처럼. 바다의 시선이 모니터에서 슬화의 얼굴로 돌아왔다. 창백한 피부 위로 내려앉은 의무실의 형광등 빛이 너무 차갑게 느껴졌다. 바다는 자신의 몸으로 빛을 가렸다. 슬화가 눈을 뜰 때, 첫 번째로 보는 것이 차가운 형광등이 아닌 자신의 얼굴이 되기를 바랐다. 바다의 왼손이 슬화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투톤 컬러의 푸른 결이 베개 위로 흘러내렸다. 해파리를 닮은, 층이 많은 머리카락. 바다의 손끝이 그 결을 따라 미끄러졌다. 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것을 다시 보고 싶었다. 해변을 걸을 때 뒤로 날리던, 그 모습을.
파장 잔류값 0.015, 안정적 상승 곡선 유지 중입니다. 코어 온도 0.8도 상승. 프리마님, 지금 이대로 유지해주십시오.
의료진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울렸다. 바다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슬화의 이마 위로 상체를 기울였다. 입술이 슬화의 이마에 닿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그 아래에서 아주 미약한 진동이 전해졌다. 파장이 반응하고 있었다. 바다의 입술을 통해 전달되는 공명이, 슬화의 이마 깊은 곳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바다의 눈꺼풀이 떨렸다. 뜨거운 것이 속눈썹 사이로 비어져 나오려 했다. 바다는 입술을 슬화의 이마에 댄 채 눈을 감았다. 물의 군주가 우는 것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바다의 눈 안쪽을 채우는 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안도였다. 간절함이 닿았다는, 뜨겁고 벅찬 안도.
헬리오스가 의료진에게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붉은 오렌지빛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한쪽 눈이 부드럽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상태로 코어가 완전히 깨어나려면 얼마나 걸려?
의료진이 태블릿을 확인하며 대답했다.
현재 상승 속도로 보면, 코어가 자율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최소 임계점인 0.1까지 도달하는 데 최소 수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 이후에도 의식이 돌아오기까지는 추가 시간이 필요하고요. 프리마님의 집중력이 유지되는 한, 가능합니다.
헬리오스가 바다의 등을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제복이 등에 달라붙어 있었고, 어깨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SS급의 힘을 수 시간 동안 이슬방울 크기로 유지하는 것.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고행인지, 같은 프리마인 헬리오스만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헬리오스는 멈추라고 말하지 않았다. 대신 의료진에게 나지막이 지시했다.
영양 수액 준비해. 중간에 끊기면 안 되니까. 그리고 이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해.
바다는 그 대화를 들었지만, 반응하지 않았다. 모든 의식이 손바닥 아래의 슬화에게 향해 있었다. 슬화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바다의 입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슬화만 들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속삭임.
천천히 와도 돼. 기다릴 테니까.
바다의 약지에서 증표가 빛났다. 슬화의 것과 같은 박자로. 점점 빨라지는 맥박처럼. 살아있는 리듬으로.
"네 이마에 닿은 내 입술을 통해 내 온 진심이 전해지길. 수 시간이 걸려도 좋아,
네가 다시 숨 쉬는 그 순간까지 난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야."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는지, 바다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의무실의 형광등은 여전히 같은 밝기로 켜져 있었고, 창밖의 햇살은 각도를 바꿔가며 바닥 위에 긴 그림자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바다의 등에서는 땀이 식어 차갑게 굳어가고 있었고, 어깨의 경련은 이제 간헐적인 것에서 지속적인 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슬화의 이마 위에 닿은 입술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파장의 교류가 바다의 유일한 시간 감각이었다. 슬화의 파장이 0.03을 넘긴 것은 두 시간쯤 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모니터 위의 숫자는.
0.097. 임계점 도달까지 0.003 남았습니다.
의료진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바다는 눈을 떴다. 시야가 흐릿했다. 몇 시간 동안 눈을 감고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탈수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팔에 연결된 수액 줄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헬리오스가 언젠가 꽂아준 것이었다. 바다의 시선이 슬화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아까와 달랐다. 확실히 달랐다. 창백하기만 했던 피부 위에 아주 미세한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입술의 색이 짙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다의 손바닥 아래에서 전해지는 체온이. 차갑지만 살아있는 차가움이.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바다의 폐에서 길고 느린 숨이 빠져나갔다. 전신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근육이라는 근육은 전부 쥐가 난 것처럼 뻣뻣했고, 두개골 안쪽에서는 둔탁한 통증이 맥박과 함께 울리고 있었다. SS급의 파장을 수 시간 동안 이슬방울 크기로 유지한 대가.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광대뼈를 쓸었다. 그 아래에서 맥박이 느껴졌다. 기계가 아닌, 슬화 자신의 심장이 만들어내는, 아주 약하지만 분명한 박동.
0.1 도달. 코어 자율 기능 회복 시작됩니다!
의료진의 외침이 의무실에 울려 퍼졌다. 바다의 손이 처음으로 미세하게 떨렸다. 슬화의 뺨 위에서 떨리는 손가락이, 더 이상 파장 조율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안도. 벅참.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이 바다의 흉곽 안에서 한꺼번에 터져 나오려 했다. 바다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이었다. 아직 슬화가 눈을 뜨지 않았다. 하지만 코어가 자율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더 이상 바다가 극한의 조율을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의료진이 다가와 바다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프리마님, 이제 출력을 천천히 올리셔도 됩니다. 코어가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의식이 돌아오기까지는 추가 시간이 필요하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이마에서 떨어졌다. 수 시간 만에 처음으로. 바다는 상체를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등이 굳어 있었다. 척추를 따라 내려오는 통증에 바다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것조차 짧은 순간이었다. 바다의 시선은 슬화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속눈썹. 바다는 슬화의 속눈썹을 보고 있었다. 떨리고 있었다. 아주 미세하게. 꿈을 꾸는 사람처럼. 바다의 손이 슬화의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이마 위로 흘러내린 푸른 결을 귀 뒤로 쓸어 올리자, 눈꽃 모양 귀걸이가 형광등 빛을 받아 작게 반짝였다.
헬리오스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몇 시간 동안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그의 얼굴에 피로가 묻어 있었지만, 입꼬리에는 부드러운 곡선이 걸려 있었다. 그가 바다를 향해 나지막이 말했다.
해냈잖아.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슬화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입술에 가져갔다. 약지 위에 새겨진 증표가 안정적인 빛을 내뿜고 있었다. 더 이상 깜빡이지 않았다. 꺼질 듯 말 듯 흔들리지 않았다. 고요하고 단단한, 살아있는 빛. 바다의 입술이 그 증표 위에 닿았다. 길고 느린 입맞춤. 바다의 눈꺼풀 사이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턱을 타고 슬화의 손등 위로 떨어진 그것은, 물의 군주가 흘리는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를 눈물이었다.
돌아와.
입술이 슬화의 손등에 닿은 채 내뱉은 한마디. 명령이 아니었다. 기도였다.
"드디어... 드디어 네 심장이 스스로 뛰기 시작했어. 이제 조금만 더, 눈을 떠서 나를 봐줘. 제발."
시간이 흘렀다. 의무실의 공기는 여전히 소독약 냄새와 기계음으로 채워져 있었지만, 그 무게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몇 시간 전까지 짓누르던 절망의 밀도가 걷히고, 그 자리를 조심스러운 안도가 채워가고 있었다. 바다의 등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져 있었다. 헬리오스가 언제 가져다 놓았는지 모를 의자였다. 바다의 오른손은 여전히 슬화의 손을 감싸고 있었고, 왼손은 무릎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수액 줄이 팔꿈치 안쪽에서 미세하게 흔들렸다. 전신의 근육이 풀려 있었다. 풀렸다기보다는, 더 이상 힘을 줄 여력이 남아있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바다의 눈은 여전히 슬화의 얼굴 위에 고정되어 있었다. 모니터 위의 수치가 0.15를 넘어 꾸준히 상승하고 있었다. 의료진은 30분에 한 번씩 수치를 확인하고 기록했지만, 더 이상 긴장한 목소리로 보고하지 않았다. 안정권이었다.
헬리오스가 커피 한 잔을 들고 돌아왔다. 그의 발소리가 조용했다. 평소의 시원한 걸음걸이와는 다른, 의식적으로 소리를 줄인 움직임이었다. 헬리오스는 바다의 옆에 커피를 내려놓고, 잠시 슬화의 모니터를 확인했다. 혈색이 돌아온 입술, 안정적으로 오르는 파장 곡선. 헬리오스의 한쪽 눈이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마셔. 쓰러지면 그 애가 눈 떴을 때 네 꼴 보고 울겠다.
헬리오스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지만, 그 안에 묻어나는 걱정은 숨길 수 없었다. 바다는 시선을 슬화에게서 떼지 않은 채 커피잔을 집었다. 손가락이 떨려 잔이 미세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 모금. 쓴 액체가 마른 목을 타고 내려갔다. 바다의 시선이 슬화의 속눈썹 위에 머물렀다. 아까보다 떨림의 빈도가 잦아지고 있었다. REM 수면과 비슷한 패턴이라고 의료진이 설명했다. 의식이 표층으로 올라오고 있다는 신호라고.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손등 위를 느리게 쓸었다. 물방울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반복하며.
그때, 슬화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바다의 손 안에서, 새끼손가락이 아주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바다의 동작이 멈추었다. 심장이 한 박자 건너뛰었다. 숨을 멈추고, 바다는 슬화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속눈썹이 떨렸다. 아까보다 크게. 분명하게. 눈꺼풀 아래에서 안구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바다의 입술이 벌어졌다. 목이 말라 있었고, 성대가 제대로 진동하지 않았다. 수 시간 동안 침묵한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슬화.
그 이름이 의무실의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바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간절함은 수면 아래의 슬화에게까지 닿을 것 같았다. 바다는 슬화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슬화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바다의 숨결이 슬화의 볼 위에 내려앉았다. 슬화의 눈꺼풀이 한 번 더 떨리더니, 아주 느리게, 아주 조금. 열리기 시작했다. 흐릿한 심해빛 눈동자가 형광등 빛 대신, 바다의 사파이어빛 눈과 마주쳤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슬화의 시선이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바다의 눈 안쪽이 다시 뜨거워졌다. 입술이 떨렸다. 하지만 바다는 웃었다. 처음으로. 수 시간 만에 처음으로,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부서질 것 같은, 하지만 분명한 미소.
여기 있어. 내가 여기 있어.
바다의 목소리가 슬화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슬화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지만, 바다는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바다'. 바다의 손이 슬화의 뺨을 감쌌다. 따뜻했다. 처음으로, 진짜로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가 바다의 손바닥 위에 닿았다. 바다의 이마가 슬화의 이마에 닿았다. 눈을 감았다. 뜨거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바다는 닦지 않았다. 닦을 필요가 없었다. 슬화가 돌아왔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고마워, 정말로... 돌아와 줘서 고마워. 이제 다시는 네 손을 놓지 않을게. 네 온기가 느껴지는 지금 이 순간이 꿈이 아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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