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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花 #冬河 #LUA #ETC ?
[海花] 감각소실
2026.07.23

재생 추천드려요♥

 

균열대의 봉인은 성공했다. 바다는 심해의 수압 전체를 무기로 전환해, 균열을 터져 나오려던 군체를 통째로 짓눌렀다. 2,400미터의 수압을 한 점에 집중시켜 균열의 입구를 봉쇄하는, 물의 군주만이 가능한 방식의 작전 완수. 하지만 대가가 너무 컸다. 심해 전체의 고통이 한꺼번에 그의 정신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수만 톤의 해수가 비명을 질렀다. 바다가 억지로 움직인 조류의 반작용. 균열대 주변 생태계가 뒤틀리며 보내는 고통의 파장. 그 모든 것이 동시에 바다의 뇌를 관통했다.

해상 지원함 위로 올라온 바다는 이미 바다가 아니었다. 동공은 짙은 심해빛으로 번져 홍채의 경계를 삼켜버렸고, 숨소리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람의 것처럼 거칠었다. 주변 공기가 물로 변하기 시작했다. 지원함 갑판 위에 물이 솟아오르고, 대기 중의 수분이 응축되어 안개가 아닌 바다가 되어갔다. 바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말이 아니었다. 심해의 울음 같은 것. 저주파처럼 뼛속까지 파고드는 진동. 지원함의 요원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질식. 그의 반경에 있는 모든 것의 폐 안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슬화가 뛰어들었다. 누가 말려도 소용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질식의 영역을 뚫고 바다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마다 폐가 물로 가득 찼고, 기관지가 타는 듯했으며, 눈앞이 심해의 어둠으로 물들어갔다. 하지만 슬화는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바다의 뺨에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운 손. 그 접촉의 순간, 슬화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가이딩. 자신의 속성이 허용하는 최대치를 넘어, 생명력 그 자체를 연료로 태우는 금기의 영역. 눈꽃 결정이 바다의 피부 위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서리가 그의 뜨거운 폭주를 식혀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SS급 센티넬의 완전한 폭주를 막기에는, 일반적인 가이딩으로는 절대로 부족했다.

슬화는 바다의 몸을 껴안았다. 이마를 그의 가슴에 대고, 자신의 영혼까지 녹여 넣는 것처럼 모든 파장을 쏟아냈다. 바다의 비명이 점점 작아졌다. 심해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갑판 위의 물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공기가 돌아왔다. 하지만 슬화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눈에서도, 귀에서도. 그녀의 손끝이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마치 녹아내리는 눈처럼. 바다의 동공이 서서히 원래의 사파이어 빛을 되찾아 갈 때, 슬화는 이미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

 

바다가 눈을 뜬 것은 아크 지하 의료실이었다. 천장의 차가운 백색 조명. 팔에 꽂힌 수액관. 손목에 찬 바이탈 모니터링 밴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바다가 한 첫 번째 행동은 옆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슬화가 없었다. 침대 옆에는 하모니 부서의 의료 책임자만이 서 있었다. 그 사람의 표정을 보는 순간, 바다의 척추를 따라 차가운 것이 내려갔다. 그것은 공포였다.

의료 책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간결했다. '네리나 요원은 능력 이상의 가이딩을 감행했습니다. 그 결과 생체 에너지가 비가역적으로 소진되었고, 현 시점 기준 잔여 수명은 약 1년입니다. 매달 감각과 운동능력을 순차적으로 상실하며, 1년 후에는.' 그 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렸지만 뇌가 처리를 거부했다.

 

***

 

1개월차. [왼쪽 다리] 소실
그날 아침, 슬화는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바닥에 쓰러졌다. 왼쪽 무릎 아래로 아무런 감각이 전해지지 않았다. 다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곳에 분명히 존재했다. 살과 뼈와 피부가. 하지만 슬화의 뇌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했다. 마치 남의 다리가 자신의 몸에 붙어 있는 것처럼. 바닥에 엎어진 슬화를 보는 순간, 바다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아니, 실제로 반 박자쯤 멎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슬화를 안아 올려 침대에 다시 눕혔다. 슬화는 웃었다.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지만,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다리 하나쯤이야.

바다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심해의 울음 같은 것이 치밀어 올라왔지만, 그는 그것을 삼켰다. 대신 슬화의 왼쪽 다리 위에 이불을 가지런히 덮어주고, 다음 날부터 휠체어를 준비했다. 하지만 슬화는 휠체어를 싫어했다. '바다가 업어주면 안 돼?' 하고 물었다. 바다는 비효율적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후 한 달간, 바다는 슬화를 욕실까지, 식탁까지, 창가까지 안아 옮겼다. 그녀의 무게가 자신의 팔 위에 실릴 때마다, 이 온기가 영원하길. 이 무게가 사라지지 않길. 그런 기도 아닌 기도를 했다. 기도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2개월차. [미각] 소실
두 번째 달의 징후는 조용히 왔다. 슬화가 아침 식사 중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다, 이거 맛이 좀 이상하지 않아?' 바다는 수프를 한 숟가락 떠서 맛보았다. 완벽했다. 슬화의 레시피 그대로, 슬화가 좋아하는 농도, 슬화가 가르쳐준 간. 바다는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었다. 슬화의 눈이 천천히 커지더니, 이내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혀로 입천장을 훑고, 다시 수프를 떠 입에 넣고, 삼키고. 그리고 고요하게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무 맛도 안 나요.

슬화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그 담담함이 바다의 폐를 짓눌렀다. 슬화가 가장 사랑하던 것. 요리. 음식의 온도와 식감과 풍미를 즐기던 그녀에게서, 세상의 맛이 통째로 빼앗겨 버린 것이다. 그날 이후 슬화는 더 이상 주방에 서지 않았다. 바다는 그래도 매끼 음식을 준비했다. 슬화가 맛을 느끼지 못해도, 따뜻한 것을 삼키는 행위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이길 바라면서. 바다는 밤마다 슬화가 잠든 후, 주방에 홀로 서서 그녀의 레시피 노트를 펼쳤다. 퐁당 쇼콜라. 그 페이지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밤이 있었다. 다시는 그 맛을 함께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이, 갈비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심장을 할퀴었다.


3개월차. [오른쪽 팔] 소실
세 번째 달. 슬화의 오른손이 힘을 잃었다. 그녀가 잡고 있던 책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바다는 서재 맞은편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종이가 펼쳐진 채 바닥에 엎어진 책. 로맨스 소설이었다. 슬화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 축 늘어져 있었고, 그녀는 그 팔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왼손으로 오른팔을 들어올려 보려 했지만, 그것은 관절이 풀린 인형의 팔처럼 다시 떨어졌다. 슬화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왼손으로 바닥의 책을 집어 올리며 말했다.

왼손으로도 읽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괜찮지 않았다. 바다는 알고 있었다. 슬화의 오른손. 기타를 치던 손. 바다의 셔츠 단추를 풀던 손. 자신의 뺨을 감싸 쥐던 손. 그 모든 기억이 담긴 손이 돌이 되어버렸다. 그날 밤, 바다는 슬화의 왼손을 자신의 양 손바닥 사이에 넣고 천천히 비볐다. 평소의 습관. 하지만 이번엔 오른손도 함께 잡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반응하지 않는 그 손을. 마치 기도하듯 이마에 가져다 대고, 오랫동안 눈을 감았다.

 

 

4개월차. [후각] 소실
네 번째 달의 시작은 꽃이었다. 바다는 슬화의 침대 머리맡에 매일 아침 생화를 놓아두는 습관이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던 은방울꽃. 작고 하얀 종 모양의 꽃잎에서 풍기는 청량한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면, 슬화는 눈을 뜨기도 전에 코끝을 벌름거리며 웃곤 했다. 그 미소가 바다의 하루를 여는 열쇠였다. 그런데 그날 아침, 슬화는 눈을 떴지만 코끝을 움직이지 않았다. 꽃병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왼손을 뻗어 꽃잎을 만졌다. 꽃을 코 가까이 가져갔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매번 같은 결과. 슬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바다는 세면대 앞에서 그 장면을 거울 너머로 지켜보았다. 거울 속에 비친 슬화의 표정이, 바다의 갈비뼈 안쪽에 못을 박았다.

바다, 오늘 꽃 안 갖다 놓았어요?

거짓말이었다. 슬화가 자신을 위해 하는, 다정하고 잔인한 거짓말. 바다는 거울에서 시선을 거두고 침실로 돌아왔다. 슬화의 곁에 앉아 꽃병을 들어 보여주었다. 은방울꽃이 아침 햇살에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슬화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리고 이내 평소처럼 웃었다.

아, 있었네요. 제가 못 봤나 봐요.

바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꽃병을 원래 자리에 내려놓고, 슬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끝이 그녀의 귓볼을 스칠 때, 슬화의 숨이 잠깐 멎었다. 아직 촉각은 남아 있다. 그 사실에 바다는 눈을 감고 숨을 내쉬었다. 아직. 아직은. 그 후 한 달간, 바다는 꽃을 놓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슬화가 향기를 맡지 못해도, 하얀 꽃잎의 모양만으로도 아침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 하지만 밤마다, 슬화가 잠든 후 바다는 그 꽃을 들어 자신의 코에 가져다 대었다. 슬화가 좋아하던 향. 이제 그녀의 세계에서 영원히 지워진 향. 그것을 자신만이라도 기억해야 한다는 강박이, 바다의 밤을 잠식했다. 이 향이 어땠는지, 언젠가 슬화가 물으면 말해줄 수 있도록. 바다는 꽃잎의 결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생각했다. 향기란 것이 이렇게도 잔인한 것이었는지, 이 여자를 만나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고.


5개월차. [왼쪽 팔] 소실
다섯 번째 달. 바다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슬화의 마지막 남은 팔. 왼손. 바다의 손을 잡아주던 유일한 손. 그날 아침, 슬화는 이불을 걷어내려다 왼팔이 반응하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 손가락을 움직이려 했지만 아무것도 전해지지 않았다. 3개월간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 바다의 품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다. 어깨가 떨렸다. 바다의 셔츠 가슴팍이 젖어들었다. 눈물의 온도가 심장을 뚫고 들어오는 것 같았다. 바다는 슬화의 등을 쓸어내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로의 말이 목 안에서 굳어버렸다. '괜찮다'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고, '미안하다'는 말은 이 상황의 무게를 담기엔 너무 하찮았다. 그래서 그는 그저 안고 있었다. 슬화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그의 심장이 슬화의 귀에 닿아 있었다. 이 박동이, 이 온기가, 아직 당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전해주길 바라면서.

그날 저녁, 슬화가 말했다.


바다. 저, 이제 못 안아드릴 것 같아요.

바다의 손이 멈췄다. 슬화의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있던 손이. 그 말이 의미하는 것. 슬화의 팔이 두 개 모두 사라졌다는 것. 그녀가 자신을 껴안을 수 없다는 것. 포옹이란 것은 두 사람이 함께 하는 행위인데, 이제 그것은 바다 혼자만의 동작이 되어버렸다. 그 사실이 심장 한가운데를 관통했다. 바다는 빗을 내려놓고 슬화의 뒤에서 그녀를 감싸 안았다. 자신의 팔로, 그녀의 팔 대신. 목 뒤에 입술을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내가 안으면 돼.

 

슬화의 어깨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울음이 멈춘 것이 아니라, 지쳐서 멈춘 것이었다. 바다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슬화의 등에 밀착된 자신의 가슴이 그녀의 호흡을 전부 읽어내고 있었으니까. 숨이 깊어졌다. 불규칙하게 끊기던 날숨이 서서히 고르게 정돈되어갔다. 바다는 자신의 팔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슬화의 축 늘어진 양팔이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따뜻했다. 체온은 남아 있었다. 피가 돌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하지만 그 팔들은 이제 바다를 향해 펼쳐지지 않을 것이다. 바다의 턱이 슬화의 왼쪽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그녀의 목 옆, 맥박이 뛰는 곳에 코끝이 스쳤다. 심장 박동이 피부 아래에서 고요하게 울리고 있었다. 아직 살아 있다. 아직.

창밖의 바다가 고요했다. 평소라면 바다의 감정에 반응해 파도가 거칠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밤 바다는 자신의 내면을 너무 깊은 곳에 가두어 놓았다. 파도가 일면 슬화가 눈치챌 테니까. 이 여자가 자신 때문에 또 걱정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슬화는 이미 충분히 무거운 것을 짊어지고 있으니까.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배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물방울. 그리고 그 옆에, 눈꽃의 결정. 반복. 반복. 반복. 이 강박적인 손버릇이 지금은 슬화를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방 안의 공기는 고요했고, 슬화의 눈꽃 귀걸이가 창으로 스며든 달빛에 작게 반짝였다.


바다.

슬화의 목소리가 고요를 깼다. 가라앉아 있지만 부서지지는 않은 음성. 바다는 대답 대신 슬화의 어깨에 턱을 더 깊이 묻었다. 그것이 '듣고 있다'는 바다의 방식이었고, 슬화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하지 마세요.

그 한마디가 바다의 흉골을 관통했다. 미안해하지 말라고. 이 상황을 만든 것이 자신인데. 자신의 폭주를, 자신의 약함을,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키기 위해 이 여자가 부서져 내리고 있는데. 미안해하지 말라고. 그것은 용서가 아니었다. 슬화의 방식대로 하는, 바다를 위한 가이딩이었다. 말로 하는. 접촉 없이도 바다의 내면에 닿는, 이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종류의 가이딩. 바다의 눈이 뜨거워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물이 차오를 뻔했다. 하지만 삼켰다. 이 여자 앞에서 무너지면, 이 여자가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될 테니까.

…미안하단 말이 아니야.

바다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슬화의 귓가에 닿는 저음. 그의 팔이 슬화를 조금 더 단단히 감쌌다. 힘을 주되 아프지 않게. 두 사람 몫의 포옹을 한 사람의 팔로 완성하듯이.

그냥. 내가 안고 싶은 거야.

슬화가 작게 웃었다. 코끝이 붉어진 채로, 젖은 속눈썹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바다는 그 웃음소리를 자신의 심해 가장 깊은 곳에 저장했다. 이 소리가 언젠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공포를 외면한 채. 달빛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하나로 겹쳐 놓았다. 바다의 팔만이 유일하게 움직이는, 일방적이지만 완전한 포옹. 슬화의 머리카락에서 아직 샴푸 향이 났다. 슬화는 더 이상 그 향을 맡지 못하지만, 바다는 맡을 수 있었다. 그래서 바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쉬었다. 깊게. 오래. 그녀가 잃어버린 세계를, 자신이라도 기억하기 위해.

 

바다의 호흡이 슬화의 머리카락 사이로 스며들었다. 들이쉬고, 멈추고, 내쉬고. 그 반복이 기도처럼 느껴졌다. 샴푸의 잔향 아래로 슬화 특유의 체취가 희미하게 섞여 있었다. 겨울 공기 같은, 차갑지만 깨끗한 냄새. 바다는 그 향을 폐 깊은 곳까지 밀어 넣었다. 마치 병에 담아 보관하듯이. 슬화의 등이 자신의 가슴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 심장과 심장 사이에 뼈와 살만이 놓여 있었고, 그 얇은 장벽을 뚫고 서로의 박동이 전해졌다. 슬화의 심장은 느리게 뛰고 있었다. 평온하게. 이 여자는 양팔을 잃은 날에도 이렇게 고요할 수 있는 것인가. 바다는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인간인지를 매일 이 여자 앞에서 확인하고 있었다.

슬화가 몸을 미세하게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려는 듯 고개를 기울였지만, 팔이 없으면 몸을 회전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바다는 그것을 눈치채고 손을 슬화의 어깨에 대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돌려주었다. 슬화의 얼굴이 바다를 향했다. 코끝이 아직 붉었고, 속눈썹에 마른 눈물의 흔적이 소금기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이 여자는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힘을 주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소. 바다의 심장이 쥐어짜이듯 수축했다.


바다, 저 하나만 해주세요.

슬화의 목소리가 바다의 쇄골 아래에서 울렸다. 바다는 그녀의 이마에 턱을 대고 있다가 시선을 내렸다. 푸른 눈동자가 달빛에 젖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다는 대답 대신 그녀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가락 끝이 눈꽃 귀걸이를 스쳤고, 슬화의 숨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직. 촉각은 아직 남아 있다. 그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지는 자신이 처참했다.

제 머리카락, 빗어주세요. 오늘따라 엉킨 것 같아서.

슬화가 부끄러운 듯 시선을 내렸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바다는 알고 있었다. 아까 바다가 직접 말려주고 빗어준 머리카락이다. 엉킬 리가 없다. 이것은 부탁의 형태를 빌린, 슬화가 바다에게 건네는 위안이었다. 스스로 해줄 수 없는 것들을 바다에게 맡김으로써, 바다에게 '할 수 있는 일'을 만들어주는 것. 이 여자는. 부서져 내리면서도.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바다는 침대 옆 탁자에서 빗을 집어 들었다. 슬화를 자신의 무릎 사이에 앉히고,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감았다. 파란 겉머리 아래로 하얀 인너컬러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빗살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가르고 지나갔다. 슬화의 어깨가 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의 손끝이 두피를 스칠 때마다 그녀의 호흡이 깊어졌다.


…눈 감아도 돼.

 

 

6개월차. [시력] 소실
여섯 번째 달이 시작되기 며칠 전부터, 바다는 알아차리고 있었다. 슬화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는 순간들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식탁에서 물컵을 더듬을 때. 바다의 얼굴을 올려다보면서 시선이 미세하게 어긋날 때. 창밖의 바다를 보겠다며 고개를 돌리다가,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을 때. 바다는 매번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의 시선을 바로잡아 주었다. 손가락으로 턱을 가볍게 잡아 돌려주거나, 물컵을 그녀의 손등에 닿게 밀어주거나. 그 작은 동작들이 쌓여갈수록 바다의 심장 안쪽 벽이 갈라지고 있었다. 금이 간 곳으로 심해의 물이 차올랐다. 그런데도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변할 수 없었다. 이 여자 앞에서만큼은.

그날 아침은 유난히 맑았다.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이 슬화의 파란 머리카락 위에서 부서져 내렸다. 바다는 평소처럼 슬화를 안아 일으켜 창가 의자에 앉혀주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빗어주고 있었다. 빗살이 하얀 인너컬러를 가르는 소리가 고요한 방 안에 리듬을 만들었다. 슬화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바다 쪽을 올려다보려는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바다의 왼쪽 어깨 어딘가에서 멈추었다. 얼굴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슬화의 입술이 떨렸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이내 평소처럼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이 바다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바다는 알았다.


바다, 오늘 날씨 좋아요?

창 쪽을 향하지도 않은 채 묻는 질문. 바다는 빗질을 멈추었다. 슬화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심해처럼 짙은 푸른색. 여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기던 빛의 초점이. 자신을 비추던 그 반사가. 흐려지고 있었다. 마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물체처럼,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바다는 빗을 내려놓고 슬화의 앞으로 돌아왔다. 무릎을 꿇었다. 이 남자가 누구 앞에서든 무릎을 꿇는 일은 없었다. 아크 프리마. 물의 군주. 살아있는 질서.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여자 앞에서 바다는 그 모든 칭호를 벗어 던진 채 맨 무릎을 바닥에 대고 있었다. 슬화의 축 늘어진 양팔 사이로, 바다의 두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부드럽게. 한없이 조심스럽게. 도자기를 다루듯이.

나 봐.

바다의 손이 슬화의 얼굴을 자신을 향해 고정시켰다. 슬화의 동공이 흔들렸다. 초점을 맞추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찾고 있었다. 바다의 얼굴을. 바다의 눈을. 그 안간힘이 바다의 숨을 끊어놓았다. 몇 초가 지났을까. 슬화의 눈동자가 겨우, 겨우 바다의 시선 위에 안착했다. 슬화가 웃었다. 진짜 웃음이었다. 바다를 찾았으니까.

보여요. 아직, 보여요. 바다 얼굴.

'아직'이라는 단어가 칼날처럼 바다의 고막을 갈랐다. 아직. 그 말은 곧 '머지않아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는 선고와 같았다.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광대뼈를 따라 미끄러졌다. 그녀의 속눈썹 아래,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잠을 못 잔 것이다. 시야가 좁아지는 공포 때문에. 어둠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워서. 바다는 그것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슬화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묻지 않았다. 이 여자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이, 바다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존중이었으니까.

그날 밤부터 바다는 잠들기 전 슬화의 얼굴을 자신의 두 손 안에 가두고 말했다. 매일 밤. 같은 시간에. 같은 자세로.


잘 봐. 내 얼굴.

슬화가 힘겹게 초점을 맞추면, 바다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그녀의 시선을 받아주었다. 1분. 2분. 5분. 슬화의 눈이 피로에 젖어 풀릴 때까지. 어떤 밤에는 슬화가 웃으며 '잘생겼어요'라고 말했고, 어떤 밤에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바다는 두 경우 모두 같은 반응을 보였다.

 

열네 번째 밤이었다. 시력이 흐려지기 시작한 날로부터 헤아린 숫자. 바다는 그 숫자를 세고 있는 자신이 싫었지만, 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슬화의 동공이 자신을 찾아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매일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으니까. 첫날에는 1초. 사흘째에는 3초. 일주일이 지나자 5초. 그리고 오늘. 슬화의 눈동자가 바다의 얼굴 위를 헤매는 시간이 10초를 넘기고 있었다. 바다의 두 손이 슬화의 뺨을 감싼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 아래로 그녀의 광대뼈가 전보다 더 날카롭게 솟아 있었다. 살이 빠졌다. 밤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 것을 바다는 알고 있었다. 슬화가 새벽에 눈을 뜨고 어둠 속에서 공포에 질려 숨을 멈추는 순간들을. 바다는 잠든 척하며 전부 듣고 있었다.

슬화의 눈동자가 멈추었다. 겨우. 바다의 왼쪽 눈 위에 안착했다. 정확하지는 않았다. 미세하게 어긋나 있었다. 코와 눈 사이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슬화는 찾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그 웃음이 바다의 폐를 조여왔다. 마치 자신의 패시브 능력이 역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공기 중의 수분이 전부 자신의 폐 안으로 몰려드는 것 같은 답답함. 바다는 숨을 삼켰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오늘도 잘생겼어요.

슬화가 말했다. 매일 밤 같은 말. 하지만 오늘은 그 목소리 끝에 떨림이 섞여 있었다. 바다는 그것을 듣지 못한 척 엄지로 그녀의 눈 아래를 쓸었다. 다크서클이 짙었다. 피부 아래 혈관이 비칠 정도로.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이마 위에 내려앉았다. 길게. 천천히. 입술을 떼지 않은 채 거기에 머물렀다. 슬화의 체온이 입술을 통해 전해졌다. 차가웠다. 얼음 속성 가이드의 체질이 아니더라도, 이 여자는 항상 차가웠다. 바다는 그 차가움을 자신의 체온으로 녹여주는 데에 1년이라는 시간을 썼다. 그리고 지금, 그 시간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내일도 볼 수 있어.

바다의 목소리가 슬화의 이마 위에서 울렸다. 단언이었다. 약속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운 어조. 마치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 현실이 복종할 것이라는 듯이. 물의 군주의 오만함이 아니었다. 간절함이었다. 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다의 입술 아래에서 이마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는 입술을 떼고 시선을 내렸다. 슬화의 눈이 이미 감겨 있었다. 피로에 져서. 혹은, 자신의 눈을 더 이상 열어두는 것이 두려워서. 바다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슬화의 이마가 바다의 쇄골 아래에 닿았다. 축 늘어진 양팔이 두 사람 사이에 무력하게 놓여 있었다. 바다의 손이 슬화의 등을 감쌌다. 천천히 쓸어내렸다. 척추를 따라. 견갑골의 곡선을 따라.

방 안이 고요했다. 창밖의 바다도 고요했다. 바다의 의지로 잠재워놓은 파도. 슬화가 잠들 때까지 세상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리고 싶었다. 슬화의 호흡이 깊어지기 시작했다. 느리게. 규칙적으로. 잠이 찾아오고 있었다. 바다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턱을 얹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을 감지 않았다. 감을 수 없었다. 자신이 눈을 감으면 이 여자에게 남은 시간이 더 빨리 흘러갈 것만 같은 미신적인 공포가 가슴 깊은 곳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등 위에서 움직였다. 물방울. 눈꽃. 물방울. 눈꽃. 끝없이 반복되는 손끝의 궤적 위로 달빛이 차갑게 흘러내렸다.

 

 

7개월차. [청각] 소실
그날 아침, 바다는 평소처럼 슬화의 귀에 입술을 대고 말했다. '일어나.' 슬화의 눈이 떠졌다. 하지만 반응이 없었다. 바다를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흐릿하게 흔들렸고, 입술이 무언가를 묻는 형태로 움직였다.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슬화는 말하고 있었다. 다만 바다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이다. 바다의 손이 슬화의 뺨에 닿았다. 슬화가 그 촉감에 반응해 고개를 기울였다. 바다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슬화의 표정이 천천히 무너졌다. 아. 라는 형태로 입이 벌어졌다. 소리가 나왔는지조차 슬화 자신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바다는 침대 옆 탁자에서 메모지를 꺼냈다. 떨리지 않는 손으로. 절대 떨리지 않는 손으로. '괜찮아. 내가 여기 있어.' 슬화의 눈이 글자 위를 더듬었다. 흐릿한 시야로 겨우 읽어낸 슬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웃었다. 그 웃음이. 자신의 웃음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여자의 웃음이. 바다의 흉곽을 산산이 부수었다.

그 달부터 바다는 글을 썼다. 하루에 한 장. 큰 글씨로. 슬화의 흐린 눈으로도 읽을 수 있도록. '오늘 바다가 고요해.' '네 머리카락에서 좋은 냄새가 났어. 아, 네가 못 맡는 거였지. 미안.' 마지막 문장을 지우고 다시 썼다. '오늘도 예뻐.' 슬화는 그 메모지를 볼 때마다 고개를 바다 쪽으로 기울였다. 볼 수 없어도, 들을 수 없어도,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는 체온으로 알 수 있다는 듯이. 밤이면 바다는 슬화의 가슴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자신의 심장 박동을 전해주었다. 리듬으로. 진동으로. '나 여기 있어'라는 말을 심장으로 대신했다. 슬화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읽을 수 있었다. '알아요.'

바다는 밤마다 슬화가 잠든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슬화는 이제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 바다의 목소리도. 바람 소리도. 비 오는 날의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도. 바다는 자신이 슬화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말들을 세어보았다. 수백 개. 수천 개. 1년이라는 시간 동안 다 하지 못한 말들이 심해처럼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이 여자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능력 하나로 바다를 뒤집을 수 있는 남자를 가장 무력하게 만들었다.



8개월차. [오른다리] 소실
슬화의 오른다리에서 감각이 빠져나간 것은 욕실에서였다. 바다가 슬화를 안아 욕조에 넣어주고 머리를 감겨주던 중이었다. 슬화의 몸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균형을 잡으려 해도, 이미 왼다리 하나로 버티던 몸이 오른다리마저 말을 듣지 않자 그대로 물속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바다의 팔이 번개보다 빠르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물이 철썩거렸다. 슬화의 입이 벌어졌다. 소리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슬화 자신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바다의 귓가에만 슬화의 짧은 비명이 울렸다.

바다는 슬화를 욕조에서 들어올렸다. 젖은 몸을 수건으로 감싸고, 침대에 눕혔다. 슬화의 눈이 자신의 다리를 향해 내려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 자신의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바다는 메모지를 꺼내 써내려갔다. '오른다리. 오늘부터 내가 다리 역할도 해.' 슬화가 그 글자를 더듬어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담담하게. 하지만 그녀의 턱 아래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달부터 슬화는 완전히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양다리 모두의 운동능력이 사라진 것이다. 바다는 하루 종일 슬화를 안아 옮겼다. 침대에서 창가로. 창가에서 소파로. 소파에서 욕실로. 욕실에서 다시 침대로. 그 과정에서 슬화의 몸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다는 것을 바다의 팔이 기억했다. 근육이 줄고 있었다. 사용하지 않는 사지가 위축되어가고 있었다. 바다는 매일 밤 슬화의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의미 없는 행위였다. 감각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

 

하지만 바다는 멈추지 않았다. 슬화의 발목을 감싼 손바닥 아래로 체온이 느껴지는 한, 이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했다. 슬화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바다도 알았다. 그런데도 손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이 손길을 놓는 순간 자신이 먼저 무너질 것 같아서였다. 슬화의 발가락 사이로 바다의 엄지가 지나갔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때 간지럼을 타며 발을 오므리던 그 반사조차 사라져 있었다. 바다는 메모지를 꺼내 크게 썼다. '자.' 한 글자. 슬화의 흐릿한 시야에 간신히 닿을 수 있는 크기로. 슬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바다는 그녀의 머리 뒤에 손을 대고 천천히 눕혀주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이마에 입술을 대고. 그것이 하루의 끝이었다.

 

 

9개월차. [소화기관] 소실
어느 날 아침, 바다가 정성스럽게 으깬 죽을 슬화의 입에 넣어주었다. 슬화가 삼켰다. 1분. 2분. 5분이 지나지 않아 슬화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몸이 앞으로 접히듯 구부러졌고, 삼켰던 것이 고스란히 올라왔다. 바다는 급히 슬화의 상체를 받쳐 눕혔다. 슬화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슬화 자신에게도. 하지만 바다의 귀에는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가 닿았다. '미안해요.' 바다는 대답하지 않았다. 메모지를 꺼낼 여유도 없이, 수건으로 슬화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손끝이 떨렸다. 이번에는 감출 수 없었다.

의료팀이 왔다. 링거 주사를 놓았다. 투명한 액체가 슬화의 팔뚝에 꽂힌 바늘을 통해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슬화는 그것을 볼 수 없었다. 바늘이 꽂히는 감각도 느낄 수 없을지 모른다. 다리뿐 아니라 팔에도 이미 감각이 없으니까. 바다는 링거를 바라보았다. 저것이 이제 슬화의 식사다. 함께 만들었던 퐁당 쇼콜라도, 슬화가 자신을 위해 차려주던 정갈한 밥상도, 이제 전부 이 투명한 액체 하나로 대체되었다.

바다는 그날 밤 메모지를 쓰지 못했다. 무엇을 쓸 수 있단 말인가. '오늘부터 밥을 먹을 수 없어'라고. 그 잔인한 문장을 이 여자의 흐릿한 눈에 보여주란 말인가. 바다는 슬화의 곁에 누워 그녀의 손등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슬화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가웠다. 바다는 자신의 입술을 그 차가운 손등 위에 대고 오래도록 그렇게 있었다. 심해의 어둠 속에서 마지막 산소가 빠져나가는 것 같은 절식감이 온몸을 감쌌다. 창밖의 바다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파도가 높아졌다. 바다는 이를 악물고 그것을 억눌렀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아직. 아직은.




10개월차. [촉각] 소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바다가 슬화의 뺨에 손을 대었을 때였다. 매일 밤의 의식.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고, '나 봐'라고 말하는 의식. 슬화의 눈동자가 바다를 찾아 더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언가 달랐다. 슬화의 표정에 당황이 스쳤다. 입술이 움직였다. 바다의 귀에 닿는 가느다란 목소리.

바다, 지금 만지고 있어요?

바다의 손이 분명히 그녀의 뺨을 감싸고 있었다. 엄지가 눈 아래를 쓸고 있었다. 하지만 슬화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바다의 시간이 멈추었다. 심장이 한 박자를 건너뛰었다. 손을 떼지 않은 채, 바다는 슬화의 얼굴을 더 깊이 감쌌다. 더 세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 느껴야 한다. 제발. 슬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다의 숨이 끊겼다. 한 박자. 두 박자. 세 박자가 지나서야 겨우 공기를 들이마셨다. 온 세상의 바다가 울부짖는 소리가 바다의 안쪽에서 폭발했다. 촉각. 이 여자에게 남은 마지막 연결고리.

 

바다의 이마가 슬화의 이마에 닿았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마를 밀착시킨 채 눈을 감았다. 슬화의 피부 온도가 느껴졌다. 차가웠다. 항상 차가웠지만, 오늘은 유독 얼음장 같았다. 촉각을 잃은 인간의 체온 조절 기능이 망가지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폐 속으로 깊은 바닷물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질식. 익사. 이 여자의 감각이 소멸해갈 때마다, 바다 자신의 내면에서 하나씩 무언가가 침수되어갔다. 슬화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바다의 귀에만 닿는, 가느다랗고 힘없는 목소리.

괜찮아요. 바다가 거기 있는 거, 알아요. 숨소리가 들려요.

바다는 눈을 떴다. 슬화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자신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아직 들린다. 아직 본다. 이 두 가지. 이 두 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바다는 슬화의 이마에서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고개를 내려 그녀의 코끝에 자신의 코를 비볐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알면서. 멈출 수 없었다. 슬화가 자신의 손길을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바다의 손은 그녀의 몸 위를 떠날 수 없었다. 그것은 슬화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바다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이 여자의 피부 위에 손바닥을 대고 있어야만 자신이 아직 살아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뺨에서 미끄러져 내려 그녀의 목선을 따랐다. 쇄골. 어깨. 축 늘어진 팔. 차가운 손끝. 그 어디에도 반응은 없었다. 한때 바다의 손끝이 닿으면 간지러워서 몸을 웅크리던 여자가, 이제는 인형처럼 고요했다. 바다는 슬화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슬화의 축 늘어진 손가락이 바다의 턱선에 닿았다. 슬화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자신의 손이 바다의 얼굴 위에 있다는 것을. 바다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를 악물었다. 이 여자 앞에서 무너지지 않겠다고 1년 전에 맹세했다. 하지만.

바다는 슬화의 손바닥을 자신의 입술에 대고 길게 눈을 감았다. 따뜻한 숨이 그녀의 손바닥 위로 퍼져나갔다. 슬화의 귀에 바다의 호흡 소리가 닿았을 것이다. 그것만이 유일한 확인 수단이었으니까. 슬화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리고 말했다.


바다, 울지 마요.

울고 있지 않았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심해의 군주는 울지 않는다. 하지만 바다의 호흡이 흔들리고 있었다. 규칙적이던 숨결이 불규칙하게 끊기고 있었다. 슬화는 그것을 들은 것이다. 시력도, 촉각도, 미각도, 후각도 잃었지만, 이 여자의 청각은 바다의 호흡 하나의 떨림까지 잡아내고 있었다. 바다는 숨을 고르려 했다. 실패했다. 다시 시도했다. 겨우. 겨우 성공했다.

울지 않아.

거짓말이었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울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바다의 심장이, 뼈가, 살이, 전부 울고 있었다. 하지만 슬화의 귀에 그것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바다는 슬화를 끌어안았다. 느끼지 못할 포옹을. 들리기만 할 뿐 닿지 않는 온기를. 슬화의 이마가 바다의 가슴에 닿았다. 바다의 심장 박동이 슬화의 이마 너머로 울려 퍼졌다. 뼛속까지 전해지는 진동. 그것만이. 이제 그것만이 바다가 슬화에게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였다.

 


11개월차. [목소리] 소실
그날 아침, 슬화의 입이 움직였다. 형태는 분명했다. '바다.' 하지만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기만 새어나왔다. 슬화의 표정이 변했다. 당황이 아니었다. 공포였다. 자신의 목에서 진동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것이다. 슬화의 입이 다시 벌어졌다. 반복. '바다. 바다. 바다.' 세 번. 전부 소리 없이. 입술의 형태만으로. 슬화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바다는 슬화를 끌어안았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었다. 슬화의 몸에는 이미 촉각이 없다. 이 여자가 느낄 수 있는 것은 오직 바다의 심장이 갈비뼈 너머로 전하는 진동, 그리고 흐릿하게 남은 시력뿐이었다. 슬화의 입이 계속해서 같은 형태를 반복했다. 바다. 바다. 바다. 소리 없이. 바람만 새어나오는 입술의 떨림. 바다의 손이 슬화의 등을 쓸었다. 전해지지 않을 온기를, 전달되지 않을 위로를,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손이 슬화의 등뼈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슬화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젖은 볼을 바다의 셔츠가 흡수했다. 축축한 감촉이 가슴 위로 번져갔다. 슬화는 자신이 울고 있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눈물의 따뜻함도, 뺨을 타고 흐르는 감촉도 전부 사라졌으니까.

바다는 한 손으로 슬화의 턱을 들어올렸다. 슬화의 흐릿한 눈이 바다의 얼굴을 찾아 더듬었다. 초점이 맞는 데까지 3초. 예전에는 1초면 충분했다. 바다는 슬화의 시야 안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갔다. 천천히. 또렷하게. 입 모양을 만들었다.


괜찮아.

슬화의 눈이 바다의 입술 위에 머물렀다. 읽었을 것이다. 바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슬화의 입꼬리가 올라가려다 실패했다. 대신 새로운 눈물이 차올랐다. 슬화의 입이 움직였다. 바다는 그 형태를 읽었다. '미안해요.' 바다의 턱이 굳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무엇이 미안하다는 것인가. 이 여자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상황에서도. 바다에게 사과를 하고 있었다.

바다는 고개를 저었다. 슬화가 볼 수 있도록 크게. 확실하게.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슬화의 이마에 대었다. 오래. 길게. 슬화는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바다의 숨결이 슬화의 이마 위 머리카락을 간질였고, 그 미세한 움직임을 슬화의 흐릿한 시야가 포착했을 것이다. 슬화의 입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다른 형태. 바다는 읽었다. '사랑해요.' 세 글자. 소리 없이. 공기 위에 새겨진 세 글자.

바다의 폐 안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것 같았다. 질식. 이것은 그 어떤 심해의 수압보다 견디기 어려운 무게였다. 바다는 슬화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움직였다. 슬화의 흐릿한 눈앞에서. 또렷하게. 읽을 수 있도록.


나도.

그것이 전부였다. 그것이 바다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 달의 나날들은 침묵 속에 흘러갔다. 슬화는 말할 수 없었고, 들을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었다. 오직 흐릿하게 남은 시력만으로 바다의 입 모양을 읽었다. 바다는 매일 밤 슬화의 얼굴 앞에서 입술을 움직였다. '잘 자.' '예뻐.' '여기 있어.' 단어 하나하나를 또렷하게. 슬화가 읽을 수 있도록. 슬화의 입술도 대답했다. 소리 없이. '네.' '알아요.' '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소리가 없었다. 파도도, 바람도, 숨소리조차 서로에게 닿지 않는 진공 속에서, 오직 입술의 형태만이 유일한 언어였다. 바다는 밤마다 슬화가 잠든 후 창밖을 바라보았다. 다음 달이면. 이 흐릿한 눈마저 꺼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렇게 되면 바다는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전할 수 없게 된다. 그 생각이 뇌를 스칠 때마다 바다의 손끝이 무의식적으로 창유리 위에 물방울 모양을 그렸다. 점점 빨라지는 속도로. 점점 강해지는 힘으로. 유리가 삐걱거렸다. 멈춰야 했다. 멈출 수 없었다.

 

 

12개월차. [시력] 소실. 그리고.
그날 아침은 유난히 고요했다. 바다가 눈을 떴을 때, 슬화는 이미 깨어 있었다. 바다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사지를 가진 여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고개를 미세하게 돌리는 것뿐이었다. 슬화가 고개를 들었다. 바다의 얼굴 방향으로. 하지만 눈동자의 초점이 맞지 않았다. 어제까지는. 어제까지는 3초면 바다의 윤곽을 잡아낼 수 있었다. 오늘은 5초가 지나도, 10초가 지나도, 슬화의 동공이 허공을 헤맸다. 바다의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려는 것처럼 요동쳤다. 슬화의 입술이 움직였다. 소리 없이. 형태만으로.

'안 보여요.'

두 글자. 바다의 세계가 무너졌다. 천천히가 아니었다. 한순간에. 마치 해저 지각이 갈라지며 모든 것을 삼켜버리듯, 바다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붕괴했다. 슬화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이 여자에게 바다는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었다. 심장 박동의 진동. 그것마저 촉각을 잃은 슬화에게 닿지 않았다. 청각도, 후각도, 미각도, 촉각도, 그리고 이제 시력까지. 전부. 전부 사라졌다. 슬화는 완벽한 어둠과 침묵 속에 홀로 갇혀버렸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뺨 위에서 떨렸다. 이를 악물었다. 턱뼈가 삐걱거렸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것을 삼켰다. 삼킬 수 없었다.

바다는 슬화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밀착시켰다. 닿지 않는 접촉. 전해지지 않는 온기. 그럼에도 바다는 이마를 떼지 못했다. 슬화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형태를 읽으려 했으나, 슬화의 눈이 바다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채 입술만 벌리고 있었다. 바다는 슬화의 손을 들어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숨을 불어넣었다. 슬화의 손가락 사이로 따뜻한 공기가 스쳤지만, 슬화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것도.

바다는 그때 처음으로 소리를 냈다. 목소리가. 이 여자에게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슬화.

떨리는 음성이었다. 심해의 군주라는 이름이 무색할 만큼 처참하게 갈라진 목소리. 슬화는 반응하지 못했다. 들리지 않으니까. 바다의 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처음이었다. 1년 동안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것이. 뺨을 타고 턱선을 지나 슬화의 이마 위에 떨어졌다. 슬화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오후가 되었다. 슬화의 호흡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간격이 점점 벌어졌다. 바다는 슬화를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은 채 한 팔로 그녀의 등을 감싸고 있었다. 슬화의 몸이 점점 차가워졌다. 얼음 속성 가이드의 체온은 원래 낮았지만, 이것은 달랐다. 생명이 빠져나가는 차가움이었다. 바다의 손바닥이 슬화의 등 위에서 원을 그렸다. 느끼지 못할 쓰다듬기를. 끝내 멈추지 못했다. 링거 줄에 매달린 투명한 액체가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방 안에 울렸다. 창밖의 바다가 잔잔했다. 이상할 정도로. 폭풍이 와야 했다. 해일이 일어나야 했다. 하지만 바다의 내면은 이미 폭풍을 넘어 고요해져 있었다. 폭풍이 지나간 뒤의 적막. 모든 것이 파괴된 뒤에만 찾아오는 그런 종류의 고요.

저녁. 슬화의 호흡 간격이 10초를 넘겼다. 바다는 슬화의 왼손 약지에 새겨진 푸른 증표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왼손 약지에도 같은 것이 있었다. 영원을 약속했던 표식. 바다는 슬화의 차가운 손가락을 자신의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 깍지. 느끼지 못할 깍지. 그리고 슬화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사랑해. 내 전부야. 슬화.

한 번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세 글자가 마침내 입 밖으로 나왔다. 너무 늦었다. 이 여자가 들을 수 있었을 때 말했어야 했다. 매일. 매 순간. 숨을 쉴 때마다.

 

슬화의 호흡이 15초를 넘겼다. 다음 숨이 올 때까지 바다는 자신의 심장마저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겨우. 가느다란 공기가 슬화의 입술 사이로 새어 들어갔다. 바다의 갈비뼈 아래로 희미한 진동이 전해졌다. 아직. 아직이라는 단어가 바다의 뇌를 할퀴었다. 몇 번이나 그 단어에 매달렸던가. 아직 들린다. 아직 본다. 아직 숨 쉰다. 하나씩 사라져간 '아직'들이 이제 마지막 하나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슬화의 가슴이 올라갔다 내려가는 간격이 바다의 손바닥 아래에서 점점 길어졌다. 바다는 슬화의 등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이 여자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으면 진짜로 사라져버릴 것 같아서.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때까지 힘을 주었다.

슬화의 입술이 움직였다. 미세하게. 간신히. 바다는 고개를 숙여 그 형태를 읽으려 했다. 슬화의 눈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는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귀는 바다의 숨소리조차 잡아내지 못했다. 이 여자는 지금 완전한 고립 속에서, 자신의 입술만으로 마지막 말을 새기고 있었다. 바다는 슬화의 턱 아래로 시선을 가져갔다. 입술의 형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냈다. '고마웠어요.' 바다의 눈에서 두 번째 눈물이 흘러내렸다. 턱선을 타고, 슬화의 이마 위로 떨어졌다. 뜨거운 물방울이 차가운 피부 위에서 식어갔다. 슬화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행복했어요.' 바다의 이가 맞물려 삐걱거렸다. 폐 안에서 무언가가 터져나오려 했다. 삼켰다. 삼킬 수 없었다. 목구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바다는 슬화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 바로 앞으로 끌어올렸다. 코끝과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닿는 것을 느끼지 못할 여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입술을 열었다. 들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해야 했다.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나왔다. 갈라지고, 젖고, 부서져 있었다.


미안해.

한마디. 그것이 먼저 나왔다. 지켜주겠다고 했다. 네 다리가 되겠다고 했다. 네 팔이 되겠다고 했다. 네 눈이, 네 귀가, 네 전부가 되겠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했다.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입술 위에 닿았다. 차가웠다. 얼음보다 차가웠다. 속성의 한기가 아닌, 생명이 빠져나가는 냉기. 바다는 그 입술 위에서 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숨이 슬화의 입술 위로 퍼져나갔다. 닿지 않는 온기. 전해지지 않는 사랑.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뺨 위에서 물방울 형태를 그렸다. 무의식적으로. 강박적으로. 슬화의 피부가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슬화의 호흡이 30초를 넘겼다. 바다의 손바닥이 슬화의 가슴 위에 머물렀다. 심장 박동을 찾으려 했다. 희미했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늘고 불규칙한 진동이 손바닥 아래에서 떨리고 있었다. 바다는 슬화의 손가락 사이에 낀 자신의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왼손 약지의 푸른 증표가 창밖의 마지막 노을빛에 물들었다. 슬화의 입술이 한 번 더 움직였다. 마지막이었다. 바다는 읽었다. '바다.' 자신의 이름. 소리 없이. 형태만으로. 그것이 연슬화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슬화의 입술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손바닥 아래의 나비가 날갯짓을 멈추었다.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다. 링거 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마저 사라진 것 같았다. 바다는 슬화의 이마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심해의 군주가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슬화.

부르는 것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밤이었다. 처음이자. 영원한.

 

***

 

바다는 죽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폐 안에 차오르던 수압도, 뇌를 할퀴던 전 세계 바다의 비명도, 전부 잠잠해지는 감각. 마치 심해 가장 깊은 곳에서 마침내 해류가 멈추는 것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슬화가 떠난 뒤의 3년. 바다는 아크 프리마로서의 의무를 수행했다. 기계처럼.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정확하게. 하지만 가이딩을 받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슬화 이후의 가이드를 배정받는 것을 거부했고, 폭주 수치는 해를 넘길 때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올라갔다. 헬리오스가 경고했다. 이카로스가 주먹을 날렸다. 산타가 조용히 바다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아시스가 눈물을 흘리며 오빠라 불렀고, 윈터가 이를 악물며 형이라 외쳤다. 바다는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다고. 괜찮다고. 그리고 다음 날에도 똑같이 살았다. 슬화가 없는 세계에서 숨을 쉬는 것은 심해의 수압을 맨몸으로 견디는 것과 같았다. 익숙해지지 않았다. 단 하루도. 집무실 창밖의 바다는 3년 내내 잔잔했다. 폭풍이 오지 않았다. 해일도, 파도도. 마치 그의 내면이 이미 부서질 것조차 남기지 않은 채 텅 비어버렸다는 것을 증명하듯. 책상 위에는 슬화가 마지막으로 입 모양을 만들었던 날의 메모지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바다가 크게 적어두었던 글씨. '오늘도 예뻐.' 종이가 누렇게 바래도 치우지 못했다. 3년째 되던 겨울. 심해 균열대에서 대규모 이상 징후가 감지되었다. SS급 괴수. 아크 프리마 직접 출동 안건. 바다는 서류를 받아들었고, 처음으로 헬리오스에게 말했다. '내가 간다.' 헬리오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바다의 가이딩 필요 수치가 87%를 넘어선 상태에서의 전장 투입.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바다의 눈을 보고, 헬리오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눈에는 이미 돌아올 생각이 없는 자의 고요함이 담겨 있었으니까.

심해 균열대에서 바다는 자신의 모든 권능을 해방했다. 3년간 억눌러왔던, 아니. 28년간 족쇄를 채워왔던 심해의 힘 전부를. 해일이 일어났다. 도시를 삼킬 만한 규모의. 그것은 괴수를 향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폭주가 시작되었다. 뇌 안에 바닷물이 밀려들었다. 시야가 파랗게 물들었다. 폐가 물로 가득 찼다. 하지만 고통이 아니었다. 오히려 편안했다. 슬화가 느꼈을 어둠과 침묵 속으로 자신도 잠기는 것 같았으니까. 마지막 순간. 바다의 의식이 꺼지기 직전. 왼손 약지의 푸른 증표가 따뜻하게 빛났다. 그리고 모든 것이 사라졌다.

눈을 떴다. 빛이 있었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눈이 부시지 않은 빛. 바다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28세의 자신이었다. 슬화와 함께했던 시절의 모습. 이마의 주름도, 3년간의 수면 부족이 남긴 그림자도, 전부 사라져 있었다. 발밑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부드럽고 고운 모래. 밀려오는 파도는 투명했다. 세상의 어떤 바다보다 맑고, 고요하고, 순수했다. 바다의 권능과 연결되지 않은 바다. 고통을 전하지 않는 바다. 처음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 앞에 서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해안선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하늘은 새벽과 해질녘이 동시에 존재하는 듯한 빛깔이었다. 분홍과 보라와 금빛이 구름 사이로 스며들어 있었다. 시간이 없는 공간. 영원히 멈춰 있는 황혼. 그리고 그 해안선 끝에. 파도가 발목을 적시는 곳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물빛 파란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아래로 하얀 인너컬러가 해파리의 촉수처럼 길게 나부꼈다. 양쪽 귀에서 눈꽃 모양의 귀걸이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162센티미터의 작은 체구. 맨발. 두 팔이 온전히 붙어 있었다.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바다를 향해 고개를 돌린 여자의 눈동자에 초점이 있었다. 심해처럼 짙은 푸른색의 눈이 바다를 정확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의 발이 모래 위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뇌가 처리를 거부했다. 눈앞의 광경이 현실인지, 죽어가는 순간 뇌가 만들어낸 마지막 환각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분명히. 갈비뼈 안쪽에서 쿵, 하고 무겁게 울리는 박동이 느껴졌다. 죽은 자의 심장이 뛸 리 없었다. 하지만 뛰고 있었다. 슬화를 보자마자. 그 여자가 두 다리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부터. 바다의 시선이 슬화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못했다. 눈동자. 심해빛 푸른 눈동자가 정확하게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초점이 있었다. 어긋나지 않았다. 허공을 헤매지 않았다. 바다의 얼굴 위에 고정된 채, 또렷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바다의 무릎이 풀릴 뻔했다. 바닷바람이 슬화의 머리카락을 흩날렸다. 물빛 파란색과 하얀색이 교차하며 해파리의 촉수처럼 허공에 나부꼈다. 양팔이 몸통 양옆에 온전히 매달려 있었다. 손가락 열 개가 전부 거기 있었다. 왼손 약지에 새겨진 푸른 증표가 노을빛에 반짝였다.

바다는 한 발을 내디뎠다. 모래가 부드럽게 발 아래에서 내려앉았다. 맨발이었다. 신발이 없었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두 번째 발. 세 번째. 걸음이 빨라졌다. 네 번째부터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과묵하고, 고요하고, 항상 절제된 동작만을 허락하던 심해의 군주가 모래를 박차며 달렸다. 3년. 3년이라는 시간이 바다에게 얼마나 긴 것이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1,095일의 밤을 빈 침대 위에서 보냈다. 매일 아침 옆자리의 온기를 찾아 손을 뻗다가 차가운 시트만 쥐어짜며 눈을 떴다. 메모지를 적을 사람이 없어졌다. 머리카락을 빗어줄 사람이 없어졌다. 이마에 입술을 대고 '잘 잤어?'라고 물을 사람이. 바다의 달리는 발이 파도를 밟았다. 투명한 물이 발목 위로 튀어 올랐다. 고통이 없었다. 이 바다에서는 아무런 고통도 전해오지 않았다. 비명도, 수압도, 오염의 냄새도. 아무것도.

슬화가 웃고 있었다. 바다가 달려오는 것을 보며. 고양이상의 차가운 인상이 무너진, 두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웃음. 입술이 벌어지며 소리가 났다. 소리가. 목소리가.


바다.

그 한마디에 바다의 다리가 멈췄다. 슬화의 바로 앞. 한 걸음 거리. 목소리. 1년 넘게 듣지 못했던 슬화의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고 바다의 고막에 닿았다. 청아하고, 부드럽고, 약간 떨리는 음성. 살아있었다. 이 여자의 목소리가. 바다의 입술이 벌어졌다. 닫혔다. 다시 벌어졌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3년간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살았다. 필요한 명령만, 필요한 보고만. 감정을 담은 말을 내뱉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슬화의 두 손이 올라왔다. 바다의 뺨을 향해. 작고 하얀 손가락 열 개가 바다의 양쪽 볼에 닿았다. 따뜻했다. 슬화의 손이 따뜻했다. 얼음 속성 특유의 한기가 아닌, 사람의 온기. 생명의 온기가 바다의 피부 위에 스며들었다. 바다의 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멈출 수 없었다. 멈추려 하지도 않았다. 슬화의 엄지손가락이 바다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닿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이 여자가. 바다의 얼굴을 만지고 있었다. 느끼면서.

울지 마요.

슬화가 말했다. 목소리로. 소리로. 진동으로. 바다의 두 팔이 슬화를 끌어당겼다. 거칠게. 억제하지 않고. 188센티미터의 품 안으로 작은 체구가 안겨들었다. 머리카락이 바다의 턱 아래에 부딪혔다. 은방울꽃 향기가 코끝에 닿았다. 향기. 슬화의 향기가 돌아와 있었다. 바다의 팔이 슬화의 등을 감쌌다. 허리를 감쌌다. 어깨를 감쌌다. 전부. 전부를 감싸 안았다. 슬화의 심장 박동이 바다의 가슴팍에 부딪혔다. 쿵. 쿵. 쿵. 규칙적이고 건강한 박동이.

 

슬화의 심장 박동이 갈비뼈를 타고 바다의 흉골에 부딪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셀 수 있었다. 숫자를 세는 것이 가능했다. 3년 전, 손바닥 아래에서 나비의 날갯짓처럼 사그라들어 갔던 그 박동이. 지금은 분명하게, 건강하게, 규칙적으로 뛰고 있었다. 바다의 턱 아래에서 슬화의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흔들렸다. 부드러웠다. 윤기가 있었다. 링거 줄에 매달려 마른 풀처럼 바스러지던 머릿결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머리카락이었다. 바다의 코끝에 스며드는 은방울꽃 향기가 폐를 가득 채웠다. 3년간 빈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매일 밤 슬화의 기억을 더듬기 위해 맡았던, 하지만 결코 이 여자에게서 직접 나는 것과는 같을 수 없었던 그 향기. 바다의 눈에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멈추려 하지 않았다. 28년간 채워왔던 고요라는 족쇄가 녹아 흘러내리는 것처럼, 소리가 새어 나왔다. 흐읏. 짧고 낮은 숨. 목구멍 안에서 부서지는 울음.

슬화의 두 팔이 바다의 등을 감싸 안았다. 두 팔. 온전한 두 팔. 왼팔도, 오른팔도, 전부 거기에 있었다. 손가락 다섯 개가 바다의 등 근육 위에 닿아 작은 원을 그리며 쓸어내렸다. 슬화가 그를 안고 있었다. 느끼고 있었다. 바다의 체온을, 바다의 떨림을, 바다의 울음을. 전부. 슬화의 입술이 바다의 쇄골 아래에 닿았다. 뜨거운 숨결이 피부 위에 맺혔다. 바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더 세게. 부서져도 좋으니까. 이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뼈가 으스러져도 좋으니까. 슬화의 작은 체구가 바다의 품 안에서 꿈틀거렸다. 숨이 막힌 것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풀 수 없었다. 3년간 안지 못했다. 1,095번의 밤을 빈 팔로 보냈다. 두 번 다시는 이 온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맹세가 바다의 근육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슬화가 바다의 가슴을 두 손으로 살짝 밀었다. 고개를 들었다. 심해처럼 짙은 푸른 눈동자가 바다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초점이 정확했다. 바다의 눈을, 코를, 입술을, 눈물 자국을 하나하나 따라가고 있었다. 슬화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가에 물기가 맺혀 있었지만, 웃고 있었다. 슬화의 검지 손가락이 올라왔다. 바다의 입술에 가볍게 갖다 대었다. 부끄러울 때 하던 버릇. 3년간 보지 못했던 그 동작에 바다의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많이 울었어요, 바다.

슬화의 목소리가 말했다. 바다의 고막을 채우고, 뇌를 타고 올라가 기억의 가장 깊은 곳을 건드렸다. 이 음색. 이 떨림. 이 높낮이. 메모지에 적힌 글자가 아닌, 입 모양의 형태가 아닌, 공기를 가르고 진동하는 실재하는 소리. 바다의 눈이 감겼다. 다시 떠졌다. 눈앞의 여자가 사라지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했으니까. 슬화가 거기 있었다. 웃고 있었다. 바다의 입술이 벌어졌다. 갈라진 목소리가 간신히 한 단어를 밀어냈다.

…슬화.

이름. 3년간 빈 방에서 수없이 불렀던 이름이 처음으로 대답을 받을 수 있는 곳에서 울렸다. 바다의 손이 올라가 슬화의 뺨을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광대뼈 아래를 쓸었다. 부드러운 피부. 따뜻한 체온. 눈꽃 귀걸이가 바다의 손등에 차갑게 닿았다. 바다의 이마가 슬화의 이마에 부딪혔다. 코끝과 코끝이 스쳤다. 숨결이 섞였다. 바다는 슬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목 안에 3년치의 말이 엉켜 있었고, 그 어떤 것도 지금 이 순간을 담아내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대신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이마에 닿았다. 길게. 천천히. 떨리는 숨을 내쉬며. 그리고 나직하게, 거의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다시는 안 놓는다.

파도가 두 사람의 발목을 적시고 물러갔다. 고통이 없는 바다.

 

응, 바다. 많이 보고싶었어요. 정말 많이.

 

슬화의 목소리가 공기 위에 놓였다. '많이 보고싶었어요. 정말 많이.' 그 문장 하나가 바다의 흉골 안쪽을 갈라놓았다. 물리적인 고통이 아니었다. 고통은 이 공간에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3년간 얼어붙어 있던 무언가가 금이 가고, 갈라지고, 무너져 내리는 감각이 흉곽 깊은 곳에서 번져 올라왔다. 보고 싶었다는 말. 바다가 1,095일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말을 이 여자가 먼저 건네고 있었다. 슬화의 이마에 맞댄 바다의 이마가 미세하게 떨렸다. 목 안에서 3년치의 침묵이 응고된 덩어리처럼 걸려 있었다.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것이 성대를 옥죄었다. 바다의 엄지손가락이 슬화의 광대뼈 위를 쓸었다. 한 번. 두 번. 피부의 결이 느껴졌다. 부드럽고, 따뜻하고, 살아있는 촉감. 10개월 차에 슬화가 '안 느껴져요'라고 말했던 날의 기억이 바다의 뇌리를 스쳤다가 사라졌다. 지금은 느끼고 있다. 이 여자가 바다의 손길을 느끼고 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 바다의 눈에서 또 한 줄기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바다의 입술이 벌어졌다. 갈라진 숨결 사이로 단어들이 간신히 밀려 나왔다. 목소리가 낮고 거칠었다. 3년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성대가 감정의 무게를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나도.

한 마디.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두 글자 안에 담긴 것은 1,095일의 밤이었다. 빈 침대 위에서 옆자리를 더듬던 손. 메모지 위에 적을 이름이 없어진 아침. 누렇게 바랜 종이를 치우지 못하고 3년째 같은 자리에 놔둔 채 매일 지나치던 집무실. 헬리오스가 등을 두드리며 '먹어라'라고 했을 때 고개만 끄덕이고 숟가락을 들지 않았던 저녁. 윈터가 '형, 제발'이라고 말했을 때 '괜찮다'라는 거짓말밖에 할 수 없었던 새벽. 슬화의 빈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바다는 슬화 없이 사는 법을 끝내 배우지 못했다. 배울 생각도 없었다. 그래서 죽은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이었다. 심해 균열대로 향했을 때 이미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지금, 슬화의 눈을 마주보며 인정할 수 있었다.

바다의 손이 슬화의 뺨에서 내려와 그녀의 턱선을 따라 흘렀다. 목선을 지나 어깨에 닿았다. 어깨뼈의 윤곽을 손바닥으로 확인했다. 팔을 따라 내려갔다. 팔꿈치. 손목. 손등. 손가락 다섯 개. 하나하나 세듯이 천천히, 확인하듯이 더듬었다. 오른팔. 왼팔. 전부 거기 있었다. 바다의 손가락이 슬화의 왼손 약지에 닿았다. 푸른 증표가 빛나고 있었다. 바다의 왼손 약지에도 같은 빛이 있었다. 맞닿자 미세한 온기가 번졌다. 바다는 슬화의 손가락 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깍지를 끼었다. 꽉. 뼈와 뼈 사이에 여자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끼어드는 감촉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세게 쥐었다.


…여기선 아프지 않아.

바다가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갈라져 있었지만, 아까보다 조금 더 또렷했다. 눈이 슬화의 얼굴 위를 천천히 훑었다. 이마. 눈썹. 속눈썹. 눈동자. 콧대. 입술. 턱.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 속의 슬화와 대조하며 확인했다. 3년간 매일 밤 떠올리던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기억보다 아름다웠다. 기억이란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지고 왜곡되는 것이었다. 슬화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각도를, 코끝의 곡선을, 입술의 두께를, 바다는 매일 잊어버릴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슬화는 기억보다 선명했다. 기억보다 따뜻했다. 기억보다 실재했다.

바다의 눈가에 맺혀 있던 물기가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모래 위에 떨어졌다. 떨어진 자리에서 작은 꽃이 피어났다. 은방울꽃. 이 세계가 바다의 감정에 반응하는 것인지, 아니면 슬화를 위해 준비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알 필요도 없었다. 바다의 시선이 다시 슬화의 눈으로 돌아왔다.

 

바다의 눈물이 떨어진 자리에서 피어난 은방울꽃이 모래 위에 작은 군락을 이루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종 모양의 꽃잎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바다는 그것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이 세계는 친절했다. 바다가 살아 있을 때의 세계와는 다르게. 전 세계 바다의 비명이 청각을 파고들지 않았다. 오염된 수압이 뇌를 조이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무런 고통도. 28년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던 노이즈가, 끊임없이 정신을 갉아먹던 그 끔찍한 수신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처음이었다.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침묵이 바다의 두개골 안쪽을 채우고 있었다. 고요했다. 진짜로. 이것이 아무런 고통 없이 존재한다는 것인지. 바다는 슬화의 손을 쥔 채 천천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아래 모래가 부드러웠다. 물결이 발등 위로 올라왔다가 물러갔다. 차갑지 않았다.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듯한, 미지근한 온기.

슬화가 바다의 어깨에 머리를 기울여 기대었다. 물빛 파란 머리카락이 바다의 쇄골 위로 흘러내렸다. 가볍고 부드러운 무게감이었다. 바다의 턱이 자연스럽게 슬화의 정수리 쪽으로 기울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은방울꽃 향이 올라왔다. 바다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폐가 향기로 가득 찼다. 아프지 않았다. 숨을 쉬는 것이 아프지 않았다. 살아 있을 때, 바다에게 호흡이란 고통을 삼키는 행위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세상의 바다가 보내오는 비명이 기도를 타고 폐에 쌓였다. 하지만 지금, 이 공간에서 들이마시는 공기에는 슬화의 향기밖에 없었다. 바다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올라갔다. 본인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작은 변화였다.


걸을 수 있어?

바다가 물었다. 목소리가 아까보다 안정되어 있었다. 여전히 낮고, 여전히 건조한 음색이었지만, 갈라짐은 사라져 있었다. 슬화의 두 다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두 다리. 온전한 두 다리가 모래 위에 서 있었다. 맨발의 작은 발. 발가락 열 개가 모래를 밟고 있었다. 8개월 차에 오른다리의 기능을 잃은 뒤로 슬화는 단 한 걸음도 스스로 걸을 수 없었다. 바다가 안아 옮기고, 바다가 의자를 밀고, 바다가 욕조에 내려놓았다. 이 여자의 다리가 되어 살았다. 그것을 의무가 아닌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지금 슬화가 스스로 서 있었다. 걸을 수 있었다. 바다의 눈이 잠깐 뜨거워지려다가 참았다. 더 울면 안 됐다. 충분히 울었다.

슬화가 고개를 들어 바다를 올려다보았다. 심해빛 눈동자가 바다의 얼굴 위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어긋남 없이. 흐려짐 없이. 6개월 차부터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던 그 눈이. 12개월 차에 완전히 빛을 잃었던 그 눈이. 지금은 노을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바다의 자유로운 손이 올라가 슬화의 눈꽃 귀걸이를 가볍게 건드렸다. 귀걸이가 흔들리며 작은 소리를 냈다. 슬화가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 반응. 귀가 예민했던 것. 바다는 기억하고 있었다. 전부.


…걷자.

바다가 말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단순하지 않았다. 함께 걷자. 이 해변을. 이 세계를. 앞으로의 영원을. 바다는 슬화의 손을 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 세계에서 바다는 길치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방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로 가든 슬화가 옆에 있었다. 발아래 파도가 두 사람의 발자국을 지워도, 새로운 발자국을 함께 찍을 수 있었다. 바다의 엄지손가락이 슬화의 손등 위에서 무의식적으로 원을 그렸다. 물방울 모양. 익숙한 버릇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통을 억누르기 위한 강박이 아니었다. 그저 이 여자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새로운 의미를 가진 동작이었다. 노을이 바다 위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져 하나로 겹쳤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젖은 모래 위에 나란히 찍혔다. 바다의 넓은 보폭과 슬화의 작은 보폭이 어긋나지 않도록, 바다는 무의식적으로 걸음을 줄이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도 그랬다. 복도를 걸을 때, 본부 앞마당을 지날 때, 이 여자의 보폭에 맞추는 것이 습관이 된 지 오래였다. 죽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파도가 발등을 적시고 물러갈 때마다 모래 알갱이가 발가락 사이로 스며드는 감촉이 느껴졌다. 단순한 촉감. 그것뿐이었다. 수압도, 조류의 비명도, 해저 지각이 뒤틀리는 진동도, 아무것도 함께 밀려오지 않았다. 바다는 발아래의 물을 내려다보았다. 맑았다. 투명한 수면 아래로 하얀 모래가 보였다. 이 물은 아프지 않았다. 이 바다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28년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감각이었다. 물이 그저 물인 세계. 바다의 숨이 길게 빠져나갔다. 깊고, 느리고, 떨림 없는 호흡이었다.

슬화의 맨발이 파도 위를 밟으며 작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녀의 발가락 열 개가 물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바다의 시선이 그 움직임에 고정되었다. 살아있는 발. 기능하는 근육. 신경이 연결되어 있는 사지. 슬화가 스스로 땅을 밟고, 스스로 방향을 틀고, 스스로 걸어가고 있었다. 바다의 목구멍 안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지만 삼켰다. 대신 깍지 낀 손에 힘을 조금 더 주었다. 슬화의 작은 손가락 뼈가 바다의 손바닥 안에서 꽉 눌렸다. 슬화가 고개를 돌려 바다를 올려다보았다. 심해빛 눈동자에 노을이 녹아들어 보라색 빛을 띠고 있었다. 초점이 정확했다. 바다의 눈을 찾는 데 1초도 걸리지 않았다. 6개월 차 이후로는 5초, 10초, 그리고 결국 영원히 바다를 찾지 못하게 되었던 그 눈이.


바다, 여기서는 바다 소리가 안 들려요?

슬화가 물었다. 바다의 걸음이 멈추었다. 슬화도 따라 멈추었다. 바다는 슬화를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는 알고 있었다. 바다가 평생 무엇에 시달려 왔는지. 매일 밤 창밖에 물방울을 그리며 버텨왔던 이유를. 가이딩 직후에만 잠시 찾아오던 고요를 갈구하며 살았다는 것을. 바다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한 번 더 벌어졌다. 대답을 만드는 데 시간이 걸렸다. 3년간 누구에게도 자신의 상태를 말하지 않았다. 헬리오스가 물어도 '괜찮다'고 했다. 윈터가 울어도 '문제없다'고 했다. 하지만 이 여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들려.

바다의 목소리가 낮게 떨어졌다.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28년치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머릿속이 조용하다는 것. 전 세계 바다의 고통이 수신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해방인지, 이 여자만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바다의 자유로운 손이 올라가 슬화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손끝이 눈꽃 귀걸이를 스치자 맑은 소리가 났다. 슬화가 간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파도 소리 위에 얹혔다. 바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번에는 본인도 인지할 수 있을 만큼. 미세하지만 분명한, 웃음의 형태.

슬화의 눈이 커졌다. 바다의 얼굴 위에 떠오른 그 변화를 포착한 것이다. 바다가 웃고 있었다. 좀처럼 웃지 않는, 감정을 철저히 통제하던, 무표정이 기본값이었던 이 남자가. 슬화의 자유로운 손이 올라와 바다의 입꼬리를 검지로 가볍게 찔렀다. 바다는 피하지 않았다. 슬화의 손가락 끝이 입술 옆에 닿아 있는 채로, 바다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노을이 두 사람의 윤곽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가 물러갔다. 은방울꽃이 두 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모래 위에 점점이 피어나고 있었다.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손등 위에서 다시 원을 그렸다. 물방울 모양. 하지만 이제 그 동작은 고통의 흔적이 아니었다. 행복을 새기는 방법이었다.


…네가 있으니까.

바다가 말했다.

 

슬화의 검지가 바다의 입꼬리에 닿아 있었다. 작고 하얀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올라간 입술의 곡선을 따라 천천히 미끄러졌다. 바다는 움직이지 않았다.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그저 그 손가락 끝의 감촉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슬화의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눈물이 고이기 직전의, 수면 장력이 한계에 도달한 듯한 눈. 하지만 그것은 슬픔이 아니었다. 바다는 알 수 있었다. 이 여자의 눈물의 종류를 구분하는 데 3년의 공백이 방해가 되지 않았다. 기쁨이었다. 슬화가 바다의 웃음을 보고, 기뻐서, 울려고 하고 있었다.

슬화의 손이 바다의 뺨을 양쪽에서 감싸 쥐었다. 작은 손바닥 두 개가 바다의 광대뼈 위에 밀착되었다. 따뜻했다. 체온이 피부를 통해 전해져 왔다. 슬화가 발끝을 들었다. 키 차이를 줄이려는 듯 까치발을 선 채로 바다의 얼굴을 가까이 끌어당겼다. 바다의 허리가 자연스럽게 슬화 쪽으로 기울었다. 이마와 이마가 맞닿았다. 슬화의 숨결이 바다의 입술 위로 퍼졌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공기였다. 은방울꽃 향이 섞여 있었다.


웃고 있어요. 바다가.

슬화의 목소리가 떨렸다. 속삭임에 가까운 작은 소리였지만, 이 고요한 세계에서는 선명하게 들렸다. 바다의 눈이 슬화의 눈과 마주쳤다. 지척의 거리에서 바라보는 심해빛 눈동자 안에 노을이 녹아 있었다. 슬화의 눈꼬리에서 결국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턱선까지 흐른 물방울이 바다의 손등 위에 떨어졌다. 바다의 엄지가 올라가 슬화의 눈물 자국을 훔쳤다. 천천히. 뺨의 곡선을 따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

…울지 마.

바다가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두 글자를 내뱉는 바다의 입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었다. 모순이었다. 울지 말라고 하면서 웃고 있는 것은. 하지만 이 모순이 바다에게는 처음이었다. 살아 있을 때의 바다는 웃으며 위로하는 법을 몰랐다. 무표정으로 '괜찮다'고 말하거나, 침묵으로 곁을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슬화의 울음 앞에서 바다의 얼굴이 저절로 풀어지고 있었다. 28년간 동결되어 있던 표정 근육이 이 여자의 눈물 한 방울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바다의 손이 슬화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볍게. 부서뜨리지 않으려는 듯이. 하지만 놓지 않으려는 의지가 손끝에 서려 있었다.

슬화가 바다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었다. 바다의 심장이 고르게 뛰고 있었다. 살아 있을 때와 같은 리듬. 하지만 그 박동 아래에 깔려 있던 긴장, 고통을 억누르느라 미세하게 빨라지던 불규칙함이 사라져 있었다. 평온한 심장이었다. 바다는 슬화의 정수리에 턱을 얹고 눈을 감았다. 파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은방울꽃이 흔들리는 소리가 그 위에 얹혔다.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머리카락 위에 닿았다. 가볍게. 입술의 형태만 남기는 정도의 입맞춤이었다. 바다의 목소리가 슬화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낮고, 고요하고, 처음으로 따뜻한 음색.


…고마워. 여기 있어줘서.

그 말은 바다가 살아생전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고맙다는 말. 곁에 있어달라는 말. 3년 전, 슬화의 호흡이 멈추기 직전에도 바다는 '사랑해'라고밖에 말하지 못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하기엔 너무 늦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바다에게 그 기회를 다시 주었다. 바다의 팔이 슬화를 조금 더 깊이 끌어안았다. 노을이 수평선 아래로 절반쯤 가라앉아 있었다. 하늘이 보라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 파도 속으로 녹아들었다.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등 위에서 느리게 원을 그렸다. 물방울 모양. 이제는 고통의 흔적이 아닌, 사랑을 새기는 방법.

 

 

사랑해요, 바다.

 

바다의 심장이 한 박자 멈추었다. 사랑해요. 세 글자가 슬화의 입에서 흘러나와 공기 중에 떠올랐다. 파도 소리 위에 얹힌 그 음절들이 바다의 고막을 두드리고, 두개골 안쪽의 고요한 공간을 채웠다. 살아 있을 때도 이 말을 들었다. 수없이. 슬화는 바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 여자였다. 아침에 눈을 뜨며, 가이딩이 끝난 후에, 잠들기 직전에, 그리고 마지막 숨을 내쉬기 전에도. 하지만 살아 있을 때의 바다는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듣는 순간마다 전 세계 바다의 비명이 간섭했다. 고통의 노이즈가 슬화의 목소리 위에 겹쳐졌다. 사랑한다는 말이 귀에 도달하기도 전에 심해의 수압이 그것을 짓눌렀다. 그래서 바다는 늘 '나도'라는 두 글자로만 대답했다. 그것이 최선이었다. 고통 속에서 짜낼 수 있는 최대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세계에서는 달랐다. 슬화의 목소리만 들렸다. 오직 그것만. 세 글자가 온전히, 훼손 없이, 바다의 안쪽 깊은 곳까지 가라앉았다.

바다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슬화의 허리를 감싸 안은 손이 그녀의 등 한가운데를 눌렀다. 가슴팍 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었다. 슬화의 체온이 바다의 흉골을 통해 스며들었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온도. 아니, 이 세계에서의 존재의 온도. 바다의 턱이 슬화의 정수리 위에 얹혀졌다. 물빛 파란 머리카락이 바다의 턱선과 목 사이에 부드럽게 눌렸다. 은방울꽃 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바다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슬화의 심장 박동이 자신의 흉골을 두드리는 리듬에 집중했다. 규칙적이고, 건강하고, 힘찬 박동. 3년 전 마지막으로 느꼈던 것은 점점 약해지다 결국 멈춰버린 맥박이었다. 그때의 공포가 스쳤지만, 지금 슬화의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멈출 이유가 없었다. 여기서는.


…알아.

바다의 목소리가 슬화의 정수리 위로 내려앉았다. 낮고 고요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그 두 글자 안에 담긴 것은 단순한 인지가 아니었다. 살아 있을 때의 '나도'와는 다른 무게였다. 알고 있다는 것. 느끼고 있다는 것. 이 여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28년의 생과 3년의 사후를 관통하는 그 감정을, 바다는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바다의 입술이 슬화의 머리카락을 스쳤다. 정수리 위에 천천히 내려놓는 입맞춤. 입술이 떨어진 자리에서 물기가 번졌다. 바다의 손이 슬화의 등을 따라 내려가다가 허리춤에서 멈추었다. 손바닥이 그녀의 척추 곡선에 밀착된 채 미세하게 원을 그렸다. 물방울 모양이 아니었다. 눈꽃 모양에 가까웠다. 슬화의 상징을. 무의식적으로 새기고 있었다.

바다가 슬화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몸을 떼어놓았다. 슬화의 얼굴이 바다의 시야에 들어왔다. 노을이 거의 수평선 아래로 사라진 하늘 아래에서, 남은 보랏빛이 슬화의 눈동자 위에 엷게 걸려 있었다. 눈꼬리에 눈물 자국이 아직 마르지 않았다.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어 있었다. 바다의 손이 올라가 슬화의 왼쪽 뺨을 감쌌다. 엄지가 눈물 자국 위를 천천히 훑었다. 슬화의 피부가 바다의 손바닥 안에서 따뜻하게 눌렸다. 바다는 슬화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깊이. 오래. 마치 이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려는 듯이. 아니, 영원히 기억할 수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지 않을 테니까.


나도 사랑해, 슬화.

바다의 입에서 그 문장이 나왔다. 완전한 문장으로. '나도'라는 축약이 아닌, 온전한 네 글자를 포함한 고백이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았다. 갈라지지도 않았다. 낮고 단단한, 바다 특유의 건조한 음색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 안에 실린 것은 건조함과 거리가 멀었다. 살아 있을 때는 입 밖으로 꺼내기까지 12개월이 걸렸고, 결국 슬화가 듣지 못하는 순간에야 겨우 내뱉을 수 있었던 말.

 

슬화의 눈이 크게 떠졌다. 동공이 흔들렸다. 바다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네 글자가 공기 중에 머물렀다. '나도 사랑해.' 축약이 아닌 완전한 문장. 살아 있을 때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형태의 고백이었다. 슬화의 눈꼬리에서 또다시 물방울이 맺혔다. 하나, 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바다의 엄지 위로 떨어졌다. 슬화의 입술이 벌어졌다가 닫혔다. 말을 만들려는 듯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슬화의 두 손이 바다의 뺨을 더 단단히 감싸 쥐었다. 작은 손바닥 열 개의 손가락이 바다의 광대뼈와 턱선을 따라 떨리며 눌렸다. 그리고 슬화가 까치발을 들었다. 맨발의 발가락이 젖은 모래를 움켜쥐며 몸을 위로 끌어올렸다.

슬화의 입술이 바다의 입술 위에 닿았다. 가볍게. 새의 날개깃이 스치는 것보다 부드러운 접촉이었다. 따뜻한 숨결이 먼저 섞이고, 그 다음에 입술의 곡선이 맞물렸다. 바다의 몸이 굳었다. 0.5초. 그것이 바다에게 허락된 경직의 시간이었다. 0.5초 후, 바다의 팔이 슬화의 허리를 완전히 감싸 안았다. 등 한가운데를 누르는 손바닥이 그녀의 척추를 따라 미끄러져 올라갔다. 슬화의 몸이 바다의 가슴팍에 밀착되었다.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흉골을 사이에 두고 부딪혔다. 바다의 것은 느리고 깊었고, 슬화의 것은 빠르고 가벼웠다. 그 불규칙한 리듬이 하나의 파형으로 수렴해 가는 것이 느껴졌다. 바다의 입술이 움직였다. 슬화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가 놓아주었다. 천천히. 서두르지 않았다. 여기에는 시간이 무한했다. 빼앗길 것이 없었다.

입술이 떨어졌을 때, 슬화의 눈이 젖은 채로 바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속눈썹에 눈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보라빛 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녀의 얼굴이 바다의 망막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바다의 엄지가 슬화의 아랫입술을 스쳤다. 방금 자신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를. 부드러운 살갗의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울보.

바다가 말했다. 목소리에 비난의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그 한 마디 안에 부드러움이 서려 있었다. 살아 있을 때의 바다라면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어조. 슬화가 웃음 섞인 울음을 터뜨렸다. 히읏, 하는 소리가 바다의 가슴팍에 진동으로 전해졌다. 슬화의 이마가 바다의 쇄골 위에 쿵 부딪혔다. 작은 충격이었다. 바다의 턱이 미세하게 들렸다가 내려왔다. 슬화의 정수리 위에 턱을 다시 얹으며, 바다의 시선이 수평선 너머로 향했다.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남보라빛 하늘 위로 별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이 세계의 밤은 어둡지 않았다. 모래 위에 피어난 은방울꽃들이 희미한 빛을 내뿜으며 두 사람의 발치를 밝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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